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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08. 2024

2.1 - ‘신’ 없음의 아이러니

‘신’ 없음의 아이러니와 ‘나’ 없음의 아이러니



전례 없는 ‘나’ 시대의 도래했음에도 그 속에서 ‘나’의 존재가 흐리멍덩하다는 시대적 아이러니를 나름대로 묘사해 보았다. 하지만 미리 정직한 태도로 고백하자면, 나 역시 한 개인으로서 이런 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명쾌하게 파악하고 해설해 낼 능력은 없다. 의미 있는 분석과 개선은 아마, 학문과 정책의 연구자들이 개인들과 진중한 대화로 협력하며 작업할 때 비로소 기대해 볼 수 있으리라 .


다만 나의 경우 (하나 더 고백하자면), 우연한 행운 덕에 이러한 세대적ㆍ시대적 아이러니를 거스르는 ‘내 존재’ 고찰의 기술배울 수 있었다. 그 방법은 바로 ‘철학’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현상학’이라는 부류의 철학이고, 더 자세히는 현상학에서 파생된 ‘실존철학’과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두 갈래의 철학이다. 시대마다 개인에게서 삶을 앗아 가는 방법이 있다는 정지우 작가의 표현처럼,* 이 철학들은 20세기가 개인들에게 범한 ‘데카당스’*에 저항했던 ‘의미 복구’의 철학들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정지우.

*‘퇴폐’ 또는 ‘몰락’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19세기말 기성적인 미적 기준에 반하는 새로운 예술적 기조에 붙여진 별명이다. 니체를 비롯한 일부 철학자들에 의해, 사회 전반에 걸쳐 가치와 의미가 쇠퇴하는 경향을 꼬집어 풍자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20세기와 21세기에도 나름의 시대적인 데카당스가 있다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후자의 개념을 채택하기로 한다.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나의 전공이 철학이 아닌 ‘신학’이었음을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신학’에 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싶다. 신학은 기독교 성직자로 진로를 설정했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관련된 교양을 획득하기 위해 선택하게 되는 학문 분과다. 신학을 전공하면, 서양철학과 종교의 역사, 그리고 헬라어나 히브리어 같은 고대언어를 배운다. 또 그 지식을 통해 성서라는 고문서 역사-문학적 해석과 교훈의 현시대적-일상적 적용을 배운다. 세분하면 주석학, 교의학, 조직신학, 성경신학, 설교학, 목회학 등 다양한 부분집합으로 나뉘지만, 결국 요약하면 방금 설명한 내용이 된다.

신학의 요체는 성서해석과 삶의 재해석이다.

학교마다 교회(교단)마다 기조가 조금씩은 다르다.  하지만 아무리 달라도 전개 과정에서 개인의 ‘신앙심’이 큰 역할을 수행한다는 일반적 특징은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성서라는 텍스트가 단순히 역사적 지식이나, 문학적인 유익만을 위해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는 엄밀하게 종교적 경전으로 기능하는 책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신앙심이 희석된 상태의 신학에는 단지 ‘철학적 해석학’의 기술적 사용과 해석 결과의 ‘실존적인 적용’ 만이 남게 된다. 게다가 신학도들은 철학도들만큼 철학 자체를 심도 있게 공부하지 않는다. 에드문트 후설이나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단지 그 부산물들을 텍스트와 일상생활 속에 적용하는 요령을 숙달하는 데 초점을 둔 채 공부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다른 동문들처럼 목회자의 꿈을 갖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는 졸업을 앞둔 끝물쯤에 개인적인 신앙심을 포기하고 철학과 인문학으로 관심을 바꾸었다. 바로 이 변심 덕분에 내 제2의 사춘기(소위 말하는 ‘오춘기’)는 다른 누구의 것보다 강렬했다. 그런 와중에도 행운이랄 것이 있었다면, 신앙과 종교가 탈색된 내 철학적 관심사가 ‘나’라는 존재, ‘삶’이라는 여정, ‘세상’과 그 속에서 함께 사는 ‘타자’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단서로서 새 역할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버려진 허물’ 같던 철학적 사유가 ‘씨게’ 찾아온 오춘기 정체성 위기에 큰 도움이 된 사실 또한 참 재밌는 인생의 아이러니다.


내게 도움이 되어 준 철학들도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다. 우선 ‘철학적 해석학’은 말과 글로 된 ‘텍스트’의 ‘의미’ 또는 ‘의도’ 등 이해 조건을 반성하고, 이를 ‘텍스트 이해’라는 인간 활동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존철학’은 생각과 선택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나’와 ‘인간 일반(모든 사람)’에 관한 철학이다. 특별히 세상 속에 공존하는 ‘남(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주체적인 생각과 선택을 실천하며 사는 일’을 논하는 데 초점을 둔다.


두 철학은 모두 어떤 20세기 독일 철학에서 파생되었는데, 바로 ‘현상학’이다. 이 철학은 실존철학과 해석학 이외에도 다양한 아류 철학들을 끊임없이 파생시켜 왔을 정도로 잠재력이 풍부한 철학이다. ‘학문과 일상의 관계’, ‘자연과학과 인문-사회적 현상의 관계’, ‘주관성과 객관성의 관계’, ‘언어와 지식(인식)의 관계’ 등이 현상학의 관심 주제다. 특히 ‘사람이라는 독특한 존재’와 사람에게 ‘세상만사가 모습(현상)을 드러내는 독특한 방식’을 ‘있는 그대로’ 사색하고 묘사하는 것을 핵심적인 목표 삼는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동시대의 다양한 철학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의 부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철학들의 경우, ‘일상’과 ‘나 자신’,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등을 직접적으로 반성하고, 한 시대가 개인에게서 앗아간 삶의 원동력인 ‘의미’를 되돌려주기 위해 분투했다는 점에서 특히나 의미 깊다.


신앙심을 잃은 뒤 나는 단지 주변학문으로서 취급했던 이 철학들을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했다. 의미를 잃어 당황했던 시대와 철학자들이 나눈 대화가 내게는 특히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에게 ‘신’이란, 모든 의미를 요약해 주는 마술적인 단어였다. 그랬던 나에게 ‘신앙의 상실’은 모든 가치와 의미의 쇠퇴를 뜻했다. 의미 요약의 주문이 사라진 나에게 철학이 준 위안은 바로 ‘나에게 가능한 의미’였다. 어쩌면 이 철학들은 21세기 ‘나 존재 담론의 아이러니’에 관하여서도 분명 유익한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데카당스에 대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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