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지성의 생각 Sep 10. 2024

3.1 - ‘나’의 이름

3 - ‘이름’과 나



임지성이라는 이름은 부모님께 받은 내 이름이다. ‘임’이라는 성씨는 ‘수풀 림(林)’을 사용하는 ‘나주 임 씨’ 계보를 따른다. 영화 속 최익현, 최형배처럼 무슨 파니, 몇 대손이니 하는 것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내 허탈한 마음이 들어 그만두었다. 이런 정보는 ‘나’를 구상하는 일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옆 나라 일본에는 지역사회에서 명맥을 지키는 지역 유지 가문들이 아직 많다는 것 같다. 내가 잘 모를 뿐이지, 우리나라에도 계보를 중시하는 ‘가문’들이 더러 있기는 할 것이다. 다만 내 경우, 성씨에서 비롯된 정체성은 매우 흐릿하다. 나는 내 조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내 조부는 그저 사진 속 인물에 불과하다. 외가, 친가 할 것 없이 내 조부모님들은 모두 나에게 계보학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에는 무관심했고, 부모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뼈대 깊은 임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계보와 성씨의 세상에서 나는 무근본 그 자체다.

사진: Unsplash의 Ben White

‘지성’이라는 이름은 좀 의미가 깊다. 부모님이 직접 지어주신 이름인데, ‘뜻 지(志)’ 자와 ‘거룩할 성(聖)’ 자가 만나 만들어진 이름이다. 두 글자를 함께 생각하면, ‘거룩한 뜻’ 또는 ‘뜻이 거룩하다’ 뜻을 가진 어구가 된다. 직접 여쭤본 적은 없지만, 아마 주기도문을 참고하여지어 주신 이름이라 생각한다. ‘거룩’과 ‘뜻’의 조합이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주기도문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요청했을 때, 예수가 가르쳤던 기도의 요체가 이 기도문에 담겨 있다. 예수는 기독교에서 으뜸가는 스승이자 신앙의 대상이다. 그리고 기도라는 행위는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매우 숭고한 종교적 행위다. 따라서 예수가 가르쳐 준 이 기도의 표본은 기독교의 정수가 담긴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거룩함’과 ‘뜻’은 주기도문의 첫 번째 단락에서 핵심적인 역할로 등장한다. 첫 번째 문장은 기도의 대상이 되는 신을 호출하는 문장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두 번째 문장은 이 “아버지”의 성품이 그 이름을 통해 널리 인정받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다음은 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에 강림할 것을 바라는 기도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어지는 문장은 이 ‘거룩한 아버지의 나라’ 강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부연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이러한 이념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요컨대 ‘하늘’이라는 신의 영역이 있는데, 그곳은 신의 거룩한 성품과 명성이 완벽하게 존중되는 곳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발 딛고 서 있는 땅도 이 ‘하늘’처럼 되는 것을 소망한다. 교회에 가본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이 기도를 들어본 적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매주, 매번의 예배 속에서 이 기도를 낭독하는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도와 내 이름의 교집합은, 기도에 등장하는 ‘신의 성품’과 ‘신의 의지’라는 관계로 연결된 기독교적 이념의 요약이다. 이 이름은 부모님이 ‘나’라는 존재 안에 투영했을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즉, 이제 막 시작된 내 인생에 ‘신의 나라’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본질적인 서사를 투사한 것이다.


부모님은 서로 닮은 구석이 별로 없는 분들이지만, 중요한 방향이 서로 일치했던 모양이다. 개척교회 목회자였던 내 아버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신앙심 깊으신 내 어머니, 두 사람의 좁디좁은 정신적 교집합 속에서 내게 ‘존재’라는 지위가 부여되었다. ‘무’였던 내가 ‘존재’가 된 계기인 만큼, 이 이름은 나주 임 씨 계보보다는 조금 더 ‘나’를 설명하는 힘이 크다. 실제로 내 어릴 적 세계관은 자연스럽게도 기독교 그 자체였다.* 따라서 이 이름은 내가 내 삶을 찾기 위해 깨부숴야 했던 나의 첫 세계관적 껍데기*였다.

* 신약성서보다는 에피소드가 더 다양했던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천주교나 정교회보다는 개신교, 특히 장로교였다.

* ‘아브락사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고대 신화 속 상징. 이 책의 주제의식은 진정한 나를 찾찾는 것이다(칼 융). 해세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바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내가 속한 정신적 세계를 탈피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필요다는 것이다(헤겔). 아브락사스는 이러한 주제 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플롯 저변에 깔린 상징이다(조로아스터교, 영지주의 사상 등).


이어지는 글 : 3.2 - 개명하는 사람들

매거진의 이전글 3 - ‘이름’과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