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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0. 2024

3.3 - ‘별명’과 나

‘이름’과 나



특정 집단이나 공동체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름‘별명’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별명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또래 집단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부르는 별명, 연인 사이에서 사용하는 애칭, 일터 또는 직장에서의 호칭, 온/오프라인에서 스스로 지어 보여주는 닉네임, 작가의 필명이나 예술가의 예명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양한 별명들은 각 별명의 사용처 즉, 그 별명을 통용하는 집단의 분위기와 집단 안에서의 내 입지와 에피소드를 반영한다.


남중ㆍ남고에 다녔던 시절에는 사춘기 수컷 무리 특유의 천박하고 익살스러운 별명들이 기출문제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며 내 이름을 다양하게도 망쳐 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내 이름은 ‘거룩한 뜻’인데, 학급에서는 ‘상스럽고 성적인 뜻’이 담긴 별명을 더 많이 불렀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불편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다름 아니라 아무리 별명이라 할지라도 ‘나’를 부르는 호칭들이기 때문이다.


정지우 작가의 에세이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에는 남자고등학교 특유의 성적인 농담들이 한국 사회의 폭력적인 남성 중심 가부장제 문화를 반영하는 사례를 잘 보여준다. 이 에세이를 읽으며 나 역시 당시 남고에서 성적인 별명이나 농담이 유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다른 성별을 향한 저급한 혐오 표현들은 명백히 성차별적인 폭력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자 학생들이 서로를 부를 때 저급한 표현을 선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하건대, 서로 친분과 신뢰 관계를 쌓기 위해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심리가 작용했던 것 같다. 더러운 별명과 농담을 더러운 별명과 농담으로 응수하면, 두 사람은 조금 더 친해진다. 약점과 치부를 은폐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적인 피로감을 ‘발가벗은 언어’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발가벗음’의 상태를 집단 안에서 기본적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서로 편해지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에 뻔뻔하게 응수하며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명 자체가 폭력이고 고통이다.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에 대한 폭력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처럼 별명은 타인과의 관계나 집단 내 문화와 얽혀 생각되는 측면이 다분하다.


별명도 이름이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이름과 연관된 정체성과 서사는 그 관계 또는 집단의 ‘역사’를 의미하게 된다. 연인 사이의 애칭은 둘 사이의 역사가 끝나는 시점에 함께 더 이상 쓸 수 없는 별명이 된다.* 종종 관계가 바뀌었음에도 기존의 별명이 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별명은 이전 관계에 대한 미련이나, 기존 관계와 현재 관계 사이의 연속성을 암시하는 단서가 된다.

* 전 연인과 썼던 별명을 다음 인연에서 다시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외다.


헤어진 연인끼리 우연이 연락이 닿거나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다시 사용되는 애칭은 끊어진 관계에 관한 미련을 암시할 수도 있다. 직장을 떠나간 사람을 계속 이전 직급으로 부르는 경우, 직장 동료로서의 관계는 끝났지만, 그 이상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군에서 복무했던 시절, 많은 경우 영관 장교들과 상ㆍ원사들이 서로를 “소댐”과 “부소댐”*으로 부르며 연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 “소대장”과 “부소대장”을 대충 빠르게 발음하는 표현.


스스로 지어 부르는 별명도 있다. 온/오프라인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작가들이 사용하는 예명이나 필명 등이 그런 사례다. 스스로 만드는 별명은, 그 별명이 통용되는 세계 안에서 이루어질 내 활동에 철학을 부여한다. 게임이나 소모임에서 쓰는 닉네임은 비교적 경쾌한 무드로 작성되는 일이 많지만, 이는 활동 자체가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활동이라는 것을 뜻한다. 많은 경우 닉네임은 그 자체로 농담 거리나 대화 주제 몇 번 언급되다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 행동이 그 닉네임에 어울리느냐 어울리지 않느냐의 문제로 다시 부상한다.


“닉값 하네.” “닉값 못하네.”


필명이나 예명 등의 활동명들은 작가 또는 아티스트의 활동을 해석하는 단서로 기능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이런 활동명을 지을 때, 자신의 작품세계, 미학 또는 예술철학 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종종 자신의 본명과 활동명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자기 작품과 활동들이 자기표현적인 활동이라는 뜻일 수 있다. 즉, 사람들이 통찰력을 발휘해 작가나 예술가 자신을 이해하는 데까지 도달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물론 활동명을 따로 쓰는 경우라도 얼굴과 본명이 공개되어 있는 경우, 자신과 활동 사이에 나름의 구분을 허용하는 동시에 그 활동이 자신의 일부임을 기꺼이 긍정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정보와 작품ㆍ활동에 대한 정보가 유기적인 지식을 구성하도록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활동명을 쓰는 익명의 작가 또는 예술가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익명으로 활동하며 활동명을 내세우는 이들의 심리는, 자신에 대한 정보가 작품이나 활동에 대한 해석을 오염시키는 게 싫은 것이다. 비록 모든 산물이 생산자의 철학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주변인들이나 대중들이 자기 산물의 고유한 가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 숨기는 척 하면서 역으로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경우도 있다. (EX - 마X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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