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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0. 2024

3.4 - 이름 짓는 권위자

‘이름’과 나



이름과 정체성과 자기 서사(self-narrative)의 관계는 삼위일체와 같다. 일반적으로 이름을 지어 붙이는 행위는 먼저 있던 자 또는 저자의 특권이다. 소설가는 작품 이전에 존재한다. 그리고 소설가는 자기 작품  등장인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그 등장인물들은 작품세계 안에서 작가가 부여하는 운명 속에서 자기 서사와 정체성을 획득한다. 등장인물들도 독자들도 작가가 지어 붙인 이름이 없었다면, 그 인물들의 정체성과 서사, 그리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악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이름 속에 어떤 마술적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름 있는 존재만이 그 이름 속에 에피소드와 교훈과 발전되는 서사를 담아낼 수 있다. 따라서 이름은 한 인물의 존재 의미가 쌓이는 그릇이다.

신의손 :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일부


창세기(1~2장)에 삽입된 천지창조 설화에는 ‘이름 붙이는 행위’가 가진 존재론적 권위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등장한다. 창세기 1장에서 신은 낮과 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한 뒤 서로 구분짓이름 붙인다. 낮과 밤을 창조하고 이름 붙임으로써 시간적 질서를 규정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창조하고 명명함으로써 공간적 질서를 규정했다. 여기서 ‘이름 짓기와 신의 ‘먼저 있음’, ‘저작자 됨’을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신은 이것저것 또 만들더니, 그 속에서 사람을 만들고 자신의 창조물들을 관리하도록 권한을 부여한다.


2장에서는 사람에게 부여된 권한이 좀 더 자세히 묘사된다. 여기서는 사람을 만든 목적이 땅을 맡겨 관리하는 것이라고 밝히는데, 그것이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신은 세상의 중심에 자신의 정원(에덴)을 만들고, 이곳의 정원사가 필요해서 사람을 만들었다. 이어지는 장면에도 이름 짓기와 존재론적 권위의 연결이 등장다.


첫 번째는 이 정원사가 자신에게 위임된 권한을 처음 행사하는 장면이다. 주목할 점은 이 권한의 행사가 바로 짐승들의 이름 짓기 라는 이다. 먼저 짐승들이 창조 되어 아담에게로 나온다. 아담에게 이런 짐승들을 창조해 낼 능력은 당연히 없다. 짐승들의 창조는 다른 모든 사물처럼 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신은 그 짐승들에 대한 지배력을 인간에게 위임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의 손 :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일부

여기서 사람에게 이름 짓도록 허락한 것은, 사람을 다른 짐승들 위에 존재하는 지배자로 설정하는 여러 장치 중 하나다.*

* 창세기 1~3장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계급 구분의 장치는 ‘음식’과 ‘의복’이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장면은 뒤에서 등장하는 여자의 창조와 명명에 관한 장면이다. 이 역시 비슷한 구도를 드러낸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마찬가지로 신은 여자의 본질을 ‘아담 돕는 배필’(20절)로 설정하여 만들어 내고, 아담은 여자에게 이름을 붙인다. 이 구도가 제시하는 바는 명백히 신과 사람이 ‘여자’에 대해 먼저 있는 존재, 저작권자, 작명권자로 군림하며 권력을 나눠 갖는 장면이다.


여러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 장면을 근거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가정에서 재생산한다. 이에 대한 내 해석은 창조설화가 기존에 이미 전통적으로 답습해 온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지, 꼭 가족 문화를 똑같은 방식으로 재생산해야만 신앙적인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자가 우위에 있는 구도는 딱히 당연한 게 아니라 배경이 되는 문화적 질서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이름 짓는 행위’가 일종의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믿는 대로 이 이야기의 저자가, 등장인물이기도 한 등장인물이기도 한 ‘신’ 자신이라면, 그가 아담에게 준 이름 짓는 권한은 나름 큰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름 짓기’는 사물을 분류하고 본질을 규정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종의 명령(order)이기 때문이다.

* 같이 살 사람이 중허지, 뭣이 중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거의 모든 사람이 부모님 또는 조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혹은 그분들이 작명가에게서 받아온 이름으로 삶을 시작한다. 이름은 나에게 투사된 소원과 본질이고, 이름은 내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아담이나, 소설 속 주인공의 사례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이름 지어준 자들이 이야기를 지배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름에 담기는 의미는 인물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는 사건들의 맥락이 결정한다. 그러나 내 이름을 지어준 분들은 소설가처럼 내 이야기를 결정할 수 없는 분들이다. 그렇게 해야 할 책임도, 의무도, 능력도 없다.


매 순간 나에게 선택지를 던져주는 존재가 운명이든 우연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과의 관점에서 보면 운명이지만, 모든 인과를 파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연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파악할 수 있는 인과의 사슬 속에는 내 생각과 행동에서 비롯된 선택들이 포함되어 있다. 각 사람의 인생에는 딱 두 명의 저자만이 존재한다. 세상과 나 자신 말이다. 내 이름의 뜻, 그 절반은 결국 내가 이 이야기 속에서 쌓아 올리는 업보라는 뜻이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이름을 바꿀 수도 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이전까지와는 다를 거라는 희망과 함께 말이다. 개명하는 사람들은 마치 부모님이 처음 내 이름을 지어줄 때처럼 신중하게 마음에 드는 좋은 이름을 고를 것이다. 작명가를 찾아가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잘 지어진 이름은 삶이 도움이 된다. 좋은 이름이 좋은 이름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내 이야기와 정체성이다. (좋은 이름도 좋은 삶 없이는 좋게 언급되지 않는 법이다.) 이름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은 결국 내 행동과 선택의 가치다. 그 가치들이 쌓여 만드는 자기 서사다. 내 이름이 나를 만들고, 다시 내가 내 이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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