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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1. 2024

4.1 - 세상 속 종교

4 - ‘신’과 나



2023년 MBC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시리즈가 넷플릭스에 공개되며, 별안간 파장을 일으켰다. 음지에서 암약하던 사이비 종교 단체 이야기를 수면 위에 띄워 대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나 역시 교주의 비행과 범죄, 이로 인한 피해자들의 상처,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2차 가해 등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특히나 내 지인들 중에는 비슷한 피해사례를 겪은 이들도 더러 있어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리즈가 공개되고 난 뒤, 나는 당분간 해당 프로그램에 대한 언론이나 인터넷상의 여론, 그리고 주변인들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폈다. 일반적인 반응은 같은 땅에서 어떻게 이 같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경악하며,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사이비 종교’와 ‘일반 종교’, 다른 말로 하면 ‘정통 종교’의 구분을 간과하고 “역시, 종교는 믿을 게 못 된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며, 나는 다른 이유로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나는 신이다” 시리즈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시리즈 공개 3개월 뒤, 사람들의 관심은 한 번씩 ‘그거 정말 충격이었다’는 정도로 경감되어 있었다. 이미 공분의 감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아직 이 다큐멘터리 속 가해자와 피해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말이다.


신학과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에 예수가 한 50~60명쯤 살고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 오륙십 명이라는 표현은 ‘어림수’*이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적 수치는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 속에 사이비 종교단체의 숫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기독교 계열을 벗어난 사이비 종교의 수까지 합산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 버림, 올림, 반올림 등의 편의상의 이유로, 또는 산술적인 한계로 사용하는 근사치.


내가 속해 있던 교단은 유독 ‘정통’이라는 정체성을 중시했다. 그래서 ‘이단ㆍ사이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얼마나 들쑤시고 다니는지, 우리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한 단체는, 그곳에 속한 신도들은 우리 교단에서 권위 있게 존중하는 신학자의 이름마저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통에 속한 신도들은 ‘이단’이라는 말과 ‘사이비’라는 말조차 잘 구분하지 못한다. 아주 잘 교육받은 신자들조차 두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두 단어의 차이는 쉽게 말해, ‘지향하는 방향’에 있다. 근본적인 가르침에서 이탈했으나, 근본적인 가르침을 추구하려는 집단은 ‘이단’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대충 용어나 문화를 빌려 쓰면서 자기들만의 세상으로 튀어 나가면 ‘사이비’로 분류된다. 어려운 설명보다 이런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직관적으로 와닿을 것이다. 두 집단으로 분류되지 않은 나머지 교단들은 모두 ‘정통’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비교적 사소한 의견 차이 때문에 나뉘어 있다.


사진: Unsplash의 Ruth Gledhill


종교적인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완전히 ‘딴 세상’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실 종교란에 “무교”를 적는 사람들에게 이단이고, 사이비고, 정통이고 나발이고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나에게 미치는 ‘피해’, 사회 속에 미치는 ‘해악’이다. 직접 와닿는 피해가 없다면, 사람들에게 종교는 문제 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정통’ 집단이라 할지라도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그 집단은 ‘사이비’나 마찬가지로 인식될 수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며 “역시, 종교는 믿을 게 못 된다”라고 반응하는 경우가 딱 그런 사례다. 정통 종교의 문제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나서, 사이비 집단의 사건을 접하면, 안 그래도 모호했던 둘 사이의 구분은 더욱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엇을 믿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일종의 ‘소수자’이고, ‘이방인’ 일뿐이다. 오히려 지금의 분위기는 강요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존중받는 분위기다.


요즘 정통에 속한 종교 단체들 중,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는 과거에 비해 드물다. 지금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일부 정통 종교들이 ‘다른’ 정통 종교들과 갈등을 빚거나,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포교 활동을 벌이는 경우가 조금 더 많았다. 이미 정통으로서의 배타적인 지위를 한 종교 안에서 점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다른 종교’ 단체는 그 단체가 해당 종교 안에서 ‘정통’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이교도’ 일뿐이다. 이들에게 ‘이단’, ‘사이비’, ‘이교도’는 모두 일종의 ‘적’이다.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 이교도’와 적극적으로 ‘거짓 가르침을 양산하는 사기꾼’들을 구분하더라도, 어찌 됐든 이 외부인들을 향하여 ‘적개심’, ‘혐오감’ 심지어는 ‘대적관’까지도 품는 것이다.


종종 이 위화감은 종교적 색채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향한다. 물론 평화로운 어조로 포교하며 선행을 베푸는 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 ‘과격분자’들의 폭력적인 언행은 말 그대로 그 종교 자체에 대한 이미지를 함께 악화시킨다. 무교인 사람들은 그 차이를 섬세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이 과격분자들의 행동은 ‘밖에서 볼수록’, 매우 난해하다. 어쩌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무교’라면, 그들에게는 오히려 당신 ‘이방인’이다. 심지어 그들의 말과 행동이 거칠어질수록, 그들은 진심으로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그런 그들을 딱하게 여기는 동안, 그들도 당신을 딱하게 여기고 있다. 당신이 그들의 권유에 적개심을 품게 되면 그들도 더욱 날을 세우며 설득하거나 저주한다. 당신이 먼저 피해를 끼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당신이 ‘무교’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당신을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에 대한 반응이 수개월 만에 소강상태가 된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사람들에게 그 피해가 (잔혹하게도) ‘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이미 종교인들의 폭력적인 대화에 관한 내성이 생겨 버린 것이다.


서로 이해되지 않는 관계. 그럼에도 이해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그곳에 현대 사회 속 종교의 참모습이 있. 그러나 세상 속에서 존중받는 바람직한 종교의 모습은 이해시키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거나 아예 체념하는 종교다. 아주 성숙한 종교인들만이 서로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대화’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것을 기꺼이 실천한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정통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 대화는 다시 어색해진다. 바꿔 말하면 종교다운* 색채가 약해질수록 종교적인 대화는 성숙해진다. 그렇게 사회 속에서 결국 종교는 영원히 ‘이방인’의 목소리로 남는다.

* 종교란, 불교에서 비롯된 용어로, ‘으뜸 된 가르침’이다. 종교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일종의 헤게모니를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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