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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1. 2024

4.3 – 신 존재 가능성

4 - ‘신’과 나



신이 존재하는 경우신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경우의 수는 단 둘 뿐이며, 두 경우가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둘 중에 무조건 하나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에 베팅하겠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걸었는데,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게다가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당신이 감수해야 하는 손해는 없다. 그냥 착각한 것뿐이다.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쪽에 걸었다면, 신이 존재하는 경우 당신은 신에게 크게 혼날지도 모른다. 다행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십년감수했다. 혼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딱히 얻을 것은 없다. 이 게임은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신 존재 증명을 위해 내세우는 논리이다. 일명 파스칼의 내기다. 파스칼은 이런 논리로 신 존재 가능성에 베팅했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에는 아무 리스크도 없으면서 커다란 혜택이 주어지는 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에는 아무 혜택도 없는 주제에 감당하기 벅찬 리스크가 걸려 있다는 판단이다.

사진: Unsplash의 Aakash Dhage

의도적인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파스칼의 내기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다. 신을 믿는 믿음은 아무 대가도 없는 믿음이 아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에는 막대한 기회비용이 수반된다. 모든 종교에는 근본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서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서사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윤리적 의무를 부과한다. 정례화된 종교적 의식에 참여해야 하고, 금전적인 공여나, 시간과 체력이 필요한 봉사의 의무를 지운다. 어떤 언행은 삼가야 하고, 어떤 언행은 적극 권장된다. 심한 경우 생물학적인 욕구를 제한할 수도 있다. 종교는  헌법이 보장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을 개인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도덕은 보다 세심한 양심과 죄의식을 요구한다. 당신이 마음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이 종교 세계 안에서는 죄악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개인과 공동체가 원칙을 갖고, 사회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과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 커다란 혜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이 종교적일수록, 그래서 그 가르침을 최고의 교훈으로 여길수록, 타인의 기준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해야 할 수도 있다. 특히 파스칼의 신처럼 신앙심 없는 이들에게 재앙과 고통을 약속하는 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신을 믿는 당신의 이타심은, 타인의 불신앙을 용납할 수 없다. 당신의 신이 신앙심 없는 그 타인에게 무서운 보복을 약속하기 때문다.


다행히 상대가 설득되어 준다면, 그를 구원할 수 있지만, 상대가 설득당해주지 않는다면, 상대를 계속 설득하며 괴롭혀야 한다. 시간이 쌓이고 설득이 반복될수록 상대는 당신에게서 점점 멀어져 간다. 당신이 상대방을 이해해 줄 수 없기에, 상대방도 당신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 설득을 체념해 버린다면, 그와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지만, 예정된 불행 속에 그를 방치하는 위선을 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당신의 삶 속에는 설득되는 사람들과 이미 그 세계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만이 남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종교 세계에서 내부자로 남는 길이다.


사진: Unsplash의 julien Tromeur


나는 중학교 2학년 과학 수업 때 선생님의 훈계를 듣고, 신 존재 가능성에 다시 베팅하게 되었다. 사춘기 학생들은 호르몬 변화에 잇따르는 변화(‘2차 성징’) 때문에 감수성이 민감하다. 그래서 학업과 이성에 관한 호기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는다. 과학 선생님은 매우 사려 깊은 분이셨다. 그래서 당시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 균형 문제에 관해서도 조언해 주셨다. 지금 느껴지는 강력한 호기심은 신체적 변화에 따른 결과이며, 학업에 집중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편이 나중에 있을 더 자유롭고 성숙한 연애를 위해 유익하다는 조언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웃어넘기는 식으로 반응했지만, 진지하게 수용하고 학업태도를 재고하는 학생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한편 그때 양쪽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하고, 샛길로 빠져나간 4차원 캐릭터가 있었다. 그 학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과 감정이 물리-화학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이성 간의 사랑, 부모 자식의 사랑, 친구 사이의 우정, 사람의 꿈 따위가 모두 진동하는 알갱이에 불과하다는 것일까?’


느닷없는 생각이지만, 저 조언은 명백하게 선생님의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정신적인 현상이 물질적인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세계관 말이다. 이런 세계관을 ‘유물론(唯物論)’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라는 철학적인 단언이다. 물론 그 조언이 세계관에 관한 설교 말씀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종교적 세계관을 탈피해 본 나에게, 조언 속에 숨어있는 이 거대 이야기는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비록 개판 5분 전인 이 세상을, 계속 방치하기만 하는 신을 다시 믿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감정과 가치를 지탱하고 있는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리고 과학 선생님조차 영혼의 존재를 설명해 줄 수 없을 것 같기에, 물질 이상의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혼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 말하면, 유물론에 의구심을 품었다. 의심은 탐구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도덕과 실존의 세계가 반드시 있다는 생각, 그리고 엄밀히 탐구된 진리의 세계는 반드시 ‘아름다울 것’이라는 심미주의적인 생각으로 말이다.


이런 짓거리가 누군가에게는 ‘신정론’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이고 현학적이기만 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어머니에게 사랑받는 것이 행복했고,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 단지 분비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줄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던 차에, 한 친구가 ‘전도 이벤트’에 참여할 것을 때마침 권유해 왔다.


친구 따라 출석했던 교회는 동네에서 제일 큰 교회였다. 그곳에서 나는 빠른 속도로 교회 문화에 동화되었다. 아버지가 운영하셨던 작은 개척교회와는 달리,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들며 노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를 교육했던 목사님은 내가 믿음을 져버린 계기였던 ‘신정론’의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 주셨다. 신의 정의는 절대적이고, 인간 사회의 악은 평범한 방식으로 모든 곳에 퍼져 있기 때문에, 당장의 심판은 전 인류의 멸망을 의미했다. 또한 신은 자비로운 성품을 지녔기에, 이러한 심판을 모면할 수 있도록 방책을 마련해 주셨다. 방책은 신의 아들을 믿고 용서받는 길을 택할 경우, 역사 속에서 집행된 예수의 처형식이 장차 닥쳐올 나의 처형식을 대체해 주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믿음을 택한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신의 마음 선물로 주어 깨끗한 삶으로 인생을 교정해 나가도록 지원해 준다고 했다.


신앙심을 포기한 뒤로 내내 신정론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살았기에, 이런 설명이 내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악이 평범하게 퍼져 있다’는 지적은, 세상 속에서만 식별해 온 ‘악’을 내 안에서 재발견하게 해 줬다는 측면에서 매우 뜨끔한 지적이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적 방해물이 사라지자, 신의 존재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내 영혼의 존재와 여기서 비롯되는 비물질적 가치들을 잃지 않아도 되었다. 영혼도, 도덕도, 가치도 전부 신의 형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이런 가치들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 세계관에 매료되어, 정말 교회를 열심히 다닐 수 있었다. 심지어는 아예 신학대학교에 진학하여 각을 잡고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신학대학교에 입학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세계관,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개신교 세계관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마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세계관의 절반을 2,500년 동안 지배해 온 만큼, 예수와 바울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의 해석이 나머지 절반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세계관만이 만인에게 소통해야 할 ‘진ㆍ선ㆍ미’라고 생각했다. 서서히 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한 방향으로 좁아져 갔다. 성서라는 책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는 것, 그리고 이런 해석학적인 결과물을 교회 공동체와 소통하여 유익하게 하는 것, 바로 ‘목회와 선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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