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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1. 2024

4.4 - DEUS EX MACHNA

4 - ‘신’과 나



잠 자는 시간, 밥을 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성서과 철학과 세상에 관한 독서에 매진했다. 심지어 순수하게 책만 읽기 위해 1년을 휴학했을 정도였으니, 말 그대로 미치광이 같은 상태였다. 4학년이 되어 학문적인 이해는 어느 정도 떠들어 댈 만큼 깊이를 더해가던 중이었다. 바로 그때 세 번째 변화가 찾아왔다.* 성경에 대한 이해도, 사람에 대한 이해도, 세상에 대한 이해도 각각 성숙해지긴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 분야에 대한 이해는 서로 잘 들어맞지 않았다.

* 첫 번째 변화는 처음 믿음을 배신했을 때(신정론의 문제), 두 번째 변화는 유물론을 거부하며 종교 세계에 복귀했을 때(도덕적 심미주의)를 말한다.


당시 몸담았던 대학교의 기조는 성서 연구가 모든 학문(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 인문학을 다 포함해서)과 일상의 해석학적 토대라는 식이었다. 뭐든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 책을 믿고 봐야 했다. 이 세상 이야기는 신이 입을 열어 이야기하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서 연구는 세상과 인생을 이해하는 가장 우월한 수단이었다. 자연과학이 밝혀내지 못하는 우주의 기원과 종말, 그리고 인문ㆍ사회학이나 철학 등이 해소해 줄 수 없는 윤리와 가치에 관한 질문까지도 다 이해하게 해주는 으뜸 가는 진리의 책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겠지만, 우선 믿어야 뭐든지 이해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념을 가진 채 공부를 거듭할수록, 성서를 이해하는 일도, 세상을 이해하는 일도,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질 뿐이었다.


사진: Unsplash의 Jeremy Thomas


고민은 대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이런 지적 혼돈을 유지한 채 무작정 목회자의 길을 걸어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무엇을 할 만한 이력조차 쌓아두지도 못했다. 대충 어물쩍 넘기며, 나 또한 대충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단 믿고 보라는 식으로 장사하는 사기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졸업 이후 1년을 더 공부하며 고민하고, 부족하다면 군 생활을 하면서까지 고민을 이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조금이라도 더 진척된 고민으로 다음 단계를 생각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고민의 기간 속에서 나는 ‘생각이 바뀌어야만 하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제까지의 삶 속에서 두 번의 커다란 사상적인 전회가 있었기에, 아무리 중요한 생각이라도 바뀌는 시점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려놓아야 하는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제대로 이해했을 때, 성서와 과학과 삶은 모두 똑같은 세상을 묘사한다는 생각.


이해를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 특히 성서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


온갖 언어를 다 뒤지면, 세상을 남김없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


우선,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매일 밤 뜬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백억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와 지구 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별빛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야 한다면, 우주와 지구와 모든 만물들이 조성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6일뿐이다. 게다가 성서에 등장하는 계보와 고고학적 사료들을 통해 추정된 우주의 연대는 겨우 6,000여 년에서 10,000여 년이다. 온갖 기계적인 환경을 떠받치고 있는 천체물리학(우주배경복사)과 물리광학(광속불변의 법칙)이 성서와 다른 말을 지껄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현대 의학의 기반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진화생물학의 증거도 미스테리였다.


그리고, 사람의 인생에 관하여도 역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여백이 남아 있었다. 신자들에게 찾아오는 불행은 ‘선한 결과로 인도하는 섭리’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해들을 기회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믿음과 용서의 기회가 제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사춘기 시절에 순진하게 납득했던 ‘신정론의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의문점이다. 게다가 용서받을 기회조차 없는 이들에게 ‘전적인 타락의 교리’*를 전가하며 사람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삶의 목표를 제한하는 세계관 역시 매우 폭력적인 이야기로 들리기 시작했다.

* 모든 인류의 조상 아담의 첫 범죄(원죄)를 통해 아담의 심성이 부패했고, 그 부패한 심성을 모든 인류가 태생적으로 공유하며, 삶 속에서 이러한 도덕적 타락이 (작위와 부작위로써) 구체적으로 실천된다는 교리. 일종의 ‘성악설’이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점은 성서라는 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핵심적인 교리들이 도출되는 중요한 본문도, 역사학적-고고학적 지식을 통해 복원한 고대인들의 상식으로 읽으면 전혀 다른 함의가 도출되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을 썼던 사람들이 의도한 내용과 다른 방식으로 읽히는 의도가 있다면, 후자는 결국 다른 상식과 관심사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사람들’의 ‘다른 의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새로운 문화가 투사된 변질된 의미 말이다. 물론 그런 함의 또한 나름대로 가치가 있겠지만, 이는 또한 ‘정통’으로 믿어온 교리들이 텍스트의 ‘본래적인 의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추론은 모두 신학교에서 배운 엄밀한 해석학적 방법을 따른 추론이었다. 걸리적거리는 것은 결국 단 하나의 편견이었다. ‘이해하기 위해 믿으라’는 것 말이다.


결론에 가까워졌을 때의 느낌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하나의 이야기로 모든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유물론’만큼이나 환원주의적이다. 이 모든 게 초등학교 6학년짜리 꼬맹이의 어리숙한 착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받이는 것이 도무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지금껏 소모된 삶이 낭비였을 수 있다는 가능성, 영혼 없는 삶 속에 남겨질 수 있는 가치에 대한 의문,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삶에 대한 허무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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