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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6. 2024

5 - ‘죽음’과 나

불안, 고통, 허무 | 죽음의 계보 | 키에르케고어와 니체의 길



불안은 허무가 삶을 항해 내뱉는 예언의 주문이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내 진정한 모습에 대한 저주다. 이 주문은 ‘내가 도달하기로 한 나’를 허깨비로 만들고, 취소해 버린다.




허무가 삶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음’의 선고를 내릴 때, 우리는 격심한 고통을 느낀다. 고통은 이미 확정돼 버린 무의미의 선언이다.




불안과 고통. 불안과 고통은 인생을 추동하는 가장 위력적인 감정이다. 불안은 고통스러운 미래에 관한 예견이며, 고통은 불안했던 예감의 성취다.




죽음은 체념과 꿈을 하나로 모은다. 죽으면 매한가지라는 철저한 체념을 통과하는 그래도, 그렇다면의 꿈. 이 관문을 통하지 않은 의미 부여는 모두 불안과 고통 사이에서 피어난 허무의 복제품에 불과하다. ‘온전한 의미 부여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완전한 허무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본래의 무게를 힘껏 실어 나를 때,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낯선 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이 낯선 의미야말로 온 인류에게 공평한 거의 유일한 조건이다. ‘죽음’은 삶에서 가장 익숙하고도 부담스러운 손님이다. 초대 없이, 느닷없이, 돌연 찾아오는, 그러나 반드시, 어김없이, 기필코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삶의 한계(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낳는다.


1. 죽어도 좋을 만큼 의미 있는 삶?


2.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죽음이라는 한계’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보람 삼아 살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삶의 철학을 전도시켜 버린다.




선택지는 오직 두 갈래 길, 키에르케고어의 길니체의 길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어거스틴의 순례자들* 내세와 영혼이라는 새 그릇을 만난.

* 어거스틴부터 야스퍼스에게까지 이어지는 순례자의 계보.




의미의 여백, 삶과 꿈의 여백을 대하는 또 하나의 대안은 바로 허무를 수용하는 길. 니체가 열어 놓은 ‘초인의 길’이다.




불안과 고통과 죽음은 모두 삶의 한계와 의미 여백에 관한 논란이다. 의미 여백의 기로에서 우리는 결국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믿을 것인가,

만들 것인가.




구성 :


5.1 불안, 고통, 허무


5.2 죽음의 계보


5.3 키에르케고어와 니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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