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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6. 2024

5.1 – 불안, 고통, 허무

5 - ‘죽음’과 나



불안은 허무가 삶을 항해 내뱉는 예언의 주문이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내 진정한 모습에 대한 저주다. 이 주문은 ‘내가 도달하기로 한 나’를 허깨비로 만들고, 취소해 버린다.


꿈을 좇아 사는 사람이 있다. 그는 꿈이 삶의 목적과 의미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그 사람의 자아실현이다. 고생 끝에 꿈을 이룬다면, 그는 생각할 것이다. ‘역시 좋은 삶이었다.’ ‘틀리지 않았다.’ ‘의미 있는 세월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것이다.’ ‘드디어 내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말이다. 우리는 이런 순간을 고대하며 이것, 저것 매번 판단하고, 결심하며,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러나 그 꿈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판단과 선택들의 타당성은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있다. 이렇게 쌓아 올린 결정적인 순간들이 헛수고로 드러날 가능성 앞에 불안을 느낀다.


세월은 끊임없이 판단할 선택지와 풀어낼 문제를 들이대며, 나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밀어 넣는다. 동시에 세월은 내가 제출한 답안지들을 하나하나 채점해 나가며, 내가 올바른 궤적 위에 있는지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을 때 나는 안심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은 남아있다. 아직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답안지 위에 비가 내리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침착한 사람은 방향을 재고할 것이다. 목적을 바꾸거나 전략이 바꾸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는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재설정된 방향마저 헛된 꿈으로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아직 기회가 많다면, 침착하게 목표나 방식을 재고할 수 있다. 하지만 쏟아낼 수 있는 열정보다 쏟아낸 열정이 더 크다면, 그만큼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커다란 고통은 때때로 이성을 마비시킨다. 폐기된 의미(매몰비용)를 부여잡고 현실 부정에 빠져 들 수도 있다. 통제하지 못할 만큼 뜨거워진 머리 때문에, 분노로 달아오른 가슴 때문에, 또 다른 잘못된 선택과 끝없이 이어지는 잘못된 선택들의 연쇄 속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이 연쇄반응은 마치 개미지옥처럼, 사람을 바닥 없는 수렁으로 계속 끌어내린다. 누군가 구원의 손이라도 뻗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될 수도 있다.


허무가 삶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음’의 선고를 내릴 때, 우리는 격심한 고통을 느낀다. 고통은 이미 확정돼 버린 무의미의 선언이다.


불안과 고통. 불안과 고통은 인생을 추동하는 가장 위력적인 감정이다. 불안은 고통스러운 미래에 관한 예견이며, 고통은 불안했던 예감의 성취다.


사진: Unsplash의 Solen Feyissa


이라고 했을 때, 흔히 ‘직업이나 활동’, ‘자산의 종류와 규모’, 또는 그 이미지에 가까운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꿈’이 말해지는 방식은 발언자의 수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포괄적으로 보면 꿈이란 결국, 내가 있어야 할 미래의 특정 맥락, 그리고 그 맥락 속에 있는 미래의 특정한 나에 관한 이야기다. ‘무언가를 하는 나’, ‘무언가를 얼마나 갖고 있는 나’, ‘저 사람과 같은 나’, ‘어떤 사람의 곁에 있는 나’ 등 말이다. 이런 다양한 표현들은 모두 ‘특정한 존재 방식과 특정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나 자신’에 대한 욕망이다.


딱히 ‘꿈’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다. 그다지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미래에 관한 소망 역시 크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꿈 갖는 일’ 자체를 순진하고 허무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한때 꿈을 꾸었을지라도 다양한 현실의 저항을 마주하며 체념했을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도, 후자의 경우도 ‘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전자의 경우 ‘현상 유지’의 꿈을 꾸는 사람이다. 아무리 오늘이 만족스럽다고 한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철저한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무엇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고, 이러한 가능성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안감은 되살아 난다.


후자처럼 꿈 자체를 회의하는 경우는 정말 꿈과 무관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꿈에 대한 회의 즉, ‘꿈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판단은, 그것이 예언적인 판단이라면, ‘불안’을 호소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경험적인 판단이라면 ‘고통’을 호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지 꿈을 꾸는 사람들 보다, 이 불안과 고통을 더욱 크게 평가하며, 기정 사실화하고 일반화하는 것일 뿐이다. ‘매도 미리 맞는 것이 낫다’고, 절망과 좌절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을 줄이고 싶어서 미리 불안과 고통에 적응하기로 했을 뿐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자신이 사실은 포기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불안과 고통에 충분히 적응했다 싶을 때면,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그렇다. 소중하고 유의미한 무언가 생기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어디엔가 내 마음이 담기게 되고, 거기서 또 다른 ‘꿈과 소망’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다 반복되는 좌절 때문에 비로소 내가 꿈을 꾸고 있었음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크나큰 좌절 때문에, 불안과 고통에 적응한다는 생각이 오판이었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꿈’과 ‘삶의 의미’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꿈’이든, ‘체념’이든 그것이 진솔한 삶의 방식이 되려면, 죽음이라는 확실하고 결정적인 종말에 생각된 방식이 아니라면, 모두 순진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체념과 꿈을 하나로 모은다. 죽으면 매한가지라는 철저한 체념을 통과하는 그래도, 그렇다면의 꿈이 관문을 통하지 않은 의미 부여는 모두 불안과 고통 사이에서 피어난 허무의 복제품에 불과하다. ‘온전한 의미 부여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완전한 허무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글 : 5.2 – 죽음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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