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토론인가, 다자 면접인가

by 임지성의 생각



사회의 합리화 역사: 탈주술화와 탈형이상학화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현대 서구형 민주주의를 포스트모더니티(탈중앙화)가 아닌, 모더니티의 연장선 위에서 인식하였다. 그점에서 하버마스는 막스 베버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선배들과 길을 달리 하였지만, 적어도 '합리화'의 역사 속에서 현대를 재인식한다는 출발점 만큼은 선배들과 길을 같이하였다.

이들이 공유하는 '합리화의 역사'는 매우 단순히 표현하면, 계몽주의적 이상*에 따라 사실과 가치를 연결하는 '장치로서의 신'을 해체했던 '탈주술화' 과정*과 가치를 인도하는 사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구현해 보려 했던 '탈형이상학' 과정*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 스스로 생각해보자는 이성의 비판적인 활용과 이를 통한 자연의 개발과 사회의 개선에 대한 낭만적 경향.

* 칼뱅주의 소명의 교리와 자본주의 분업 모형이 결합된 청교도 윤리의 종말.

* 자연과학의 방법에 인상 받은 실증주의 철학 운동, 이러한 철학 및 과학적 방법을 사회와 개인 등 전 영역에 전개하려 한 실증 사회학 운동.

하버마스가 '모더니티'를 두고 선배들과 결별했던 이유는 바로 "계몽"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테어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은 베버의 분석을 따라 "계몽"을 '개인(이성적인 주체)에 의한 조작과 통제(도구적 이성 또는 목적 합리성)'로 이해하였고, 하버마스는 "계몽"안에서 '여럿에 의한 비판과 합의(상호주관적 이성 또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발견하였다. 근대화 역사 속에서 근거와 타당성을 따져 묻고, 더 나은 의견을 수용하는 상호 이해적 대화의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버마스의 선배들에게 계몽은 곧 일자에 의한 다자의 '착취'였고*, 하버마스에게는 계몽이 다자에 의한 다자의 '해방' 및 '공존'이었다.

(계몽을 위한 계엄이 정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 물론 하버마스의 선배들은 이런 이유로 계몽주의의 이상이 잘못 발전하였다며 비판하였다.


사실과 가치, 이론과 실천, 엄밀성과 주관성

한편 이성에 관한 프랑크푸르트 비판 이론가들의 논의는 '사실과 가치의 구분'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하버마스를 비롯한 매우 많은 철학자들은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도출할 수 없다."라는 데이비드 흄의 명제를 매우 신중하게 인식한다. 특히 이 명제는 '합리화 과정'이 '탈주술화' 및 '탈형이상학화' 과정을 통해 발전했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현재 수준에서 대부분의 학문 뒤에서 아직도 이에 대한 성공적인 합의는 진행되지 못했다. 과학에 관한 실증주의와 협약주의 논쟁, 문학 및 사회학에 관한 실재론 및 구성주의 논쟁 등은 서구적 정신이 하버마스의 '합의'를 추구하는 다자화 보다는 미분화된 이권 투쟁 속에서 체념하는 포스트모더니티 쪽으로 이행하였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현상만 놓고 보면 정말 모든 사실을 개인적이며, 사실에는 가치가 묻어있고, 모든 이론이 (진리의 반영이기보다는) 이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하버마스는 근거와 타당성 만으로 '더 나은 주장'을 판별하기 어려운 상황, 특히 '복잡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임미누엘 칸트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자고 제안하였다.

칸트의 '정언 명령'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염두에 두고 발전한 '보편성'과 '본질성'의 원칙을 문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스스로를 아는 지식(이론)과 스스로 생각한 '행복한 삶'(이상)을 비교하며 의지(행위)를 위한 규칙을 정립한다고 생각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실천 규칙(전략; 가언 명령)' 이것이 진정한 윤리가 되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본질성'의 조건을 통과해 정언 명령으로 정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보편성'의 기준은 이 (실천적인) 규칙이 나만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도 타당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본질성'의 기준은 이 규칙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을 것' 즉 '사람을 목적으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칸트가 이러한 이상적인 원칙을 그나름의 '형이상학'을 통해 정당화 함으로써 또 하나의 '이론' 또는 '이념'으로 탈바꿈했던 반면, 하버마스는 '구체적인 대화'를 통해 이러한 규칙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아무런 대화가 없다면 취향과 구분될 수 없는 진리도 타당하고 신뢰할 만한 대화를 거치면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규범을 통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 '지'와 '정' 사이의 '의', '진'과 '미' 사이의 '선'.

* 도구적 이성 또는 목적 합리성을 비판했던 베버와 프랑크푸르트 선배들의 논의와도 맥이 닿는다.


태도가 지식에 우선한다

하버마스의 논의는 사실과 가치가 '나만의 것' 그래서 '각자만의 것'인지 대화를 통해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탈중앙화 경향은 우리에게 정치가 '여러 전문가 각자만의 것'인지, 아니면 경청과 반문, 과감한 이의 제기와 겸허한 수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피곤한 '모든 영역의 모두를 위한 대화'인지 되묻게 한다.

현대 사회의 탈중앙화 경향성은 증명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을 (무력을 통해 유지될 수밖에 없는*) 사회 질서로 구현하는 일이 '이론가의 눈과 입과 펜(을 든 손)'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눈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기는 하지만 온갖 의견과 이론을 듣기에도 부지런한 '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 사회는 치안과 안보라는 형식적인 경계를 통해 유지된다.

하지만 적어도 계몽주의적 이상 속에서 탄생했던 민주주의가 '열심히 고민한 혼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하버마스의 주장은 지극히 상식에 부합하는 의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화는 떠둘러 보는 눈과 골똘히 굴린 대가리, 침 튀기는 혓바닥이 아닌, 부지런히 잘 듣는 귀를 지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진실된 발의자를 요구하는 활동이다.


'학술 토론'인가 '다 대 다 면접'인가

전문적인 정치가(또는 정치꾼)는 소수이며 국민은 다수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한 명이고 국민은 다수이다. 정치가들과 후보자들은 대선 기간이 되면 국민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TV에 나와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거리를 활보하며 직접 경청하고 연설하며 대화하기도 하다.

아마 학자들이나 언론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의 여러 의견을 수집하는 일 만으로는 어떤 방향에 표를 던지는 것이 "맞는 일인지" 영원히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신(절대자 또는 초월자)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역사 이전의 현재나 미래'에 대한 진리는 결코 파악될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유심히 관찰하고 고민하며 열린 태도로 이들을 관찰하고 경청하면 적어도 우리는 이들이 우리를 대한 태도를 분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를 정책의 대상자로만 취급하는 이론가 또는 실험가인지, 아니면 우리를 유권자로 대하는 대표자인지. 또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정책 대상자에 불과한지 아니면 주권을 지닌 민주 국가의 시민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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