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약도를 든 현실 세계의 여행자

by Suzanne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고전 읽기' 수업의 과제로 발표했던 프레젠테이션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5년 전 글에서 보이는 어리숙함이 매우 반갑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수도원>을 중심으로 그녀의 작품관을 탐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소설을 삶으로 증명하다, 제인 오스틴

제인 오스틴은 1775년 영국 햄프셔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고 독서와 문학을 사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형제들과 자라났다. 그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이면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던 시대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어떤 남성과 결혼하느냐가 평생의 생활 수준을 결정하던 때에 그는 작가 활동으로 스스로의 삶을 꾸렸다. 이렇게 범상치 않은 그의 낭만적이고 유쾌발랄한 사랑관은 그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제인 오스틴을 로맨스의 대가라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보자면 그의 장르는 로맨스 코미디이다. 로맨스에 특유의 위트와 해학, 비꼬기와 풍자를 적절히 섞어내 로맨스와 코미디의 조화를 이루었고 현대에도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42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지만 첫 작품인 <이성과 감성> 이후 <오만과 편견>, <맨스필드 파크>, <엠마>, <설득>을 완성하여 출간했으며 사후 미완성작과 미출간 초기작 <노생거 수도원>, <레이디 수전>, <왓슨 가족>, <샌디턴>이 출간되었다. 그의 소설 9편은 모두 드라마, 영화화되었고 특히나 로맨스 코미디를 즐기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정서와도 잘 맞아 <오만과 편견> 등은 한국에서도 특히 널리 읽히는 스테디셀러 중 하나이다.

그동안 몰랐던 캐릭터, 캐서린 몰랜드

“어릴 적 캐서린 몰랜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녀가 여주인공이 될 운명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리라.” 라는 대담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노생거 수도원>은 평범하고 명랑하며 꾸밈 없이 털털하고 솔직한 성격인, 으스스한 분위기의 고딕 소설을 즐겨읽는 17살 여주인공 캐서린이 휴양지 바스에서 머물면서 만난 소프 남매, 틸니 남매와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헨리 틸니와 가까워지며 그의 별장인 노생거 수도원에 초대받게 되고 소설 속 음침하고 무서운 수도원을 상상하며 벌어지는 오해와 사랑의 위기를 이겨내고 결국 사랑을 쟁취하게 되는 결말로 끝맺는다.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인 오스틴이 습작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완성한 소설이지만 당시에는 출판사에서 거절당하여 출간되지 못하고 사후 가장 마지막으로 출간되어 그의 첫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소설 곳곳에 참신하고 도전적인 설정과 장치들이 많이 들어가있으며 발칙하고 대담하며 순수한 발랄함이 드러난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캐서린 몰랜드의 캐릭터 설명은 우리나라 로코 드라마 속 전형적인 여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의 전형적이고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여성 캐릭터가 200년 전 처음으로 등장하였을 때는 그야말로 파격이었을 것이다. 캐서린은 외모가 못나진 않았지만 빼어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조신하거나 행동이 우아한 것도 아니며 내숭이라곤 전혀 모르는 숙녀와는 거리가 먼 매우 솔직한 여성이다. 자식이 10명이나 되는 집안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상류층 문화에도 미숙하고 어리고 공상과 망상도 당당히 즐긴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가만히 사랑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사랑에 빠져 초조해하고, 자신이 느끼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사랑 앞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도 보인다.

파격적 연애소설로 사회를 비꼬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관습을 비꼬았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오스틴은 ‘소설의 관습’을 비꼰다. 소설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 전체와 2부의 결말부에서 작가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깨고 해설자로 등장하여 보편적인 소설과 자신의 작품 속 여주인공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대뜸 늘어놓는다. “나는 소설가들이 따르는 쩨쩨하고 졸렬한 관습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라거나, 한창 사랑의 위기에 빠져있던 여주인공이 위기로부터 해소되는 순간 “이런 상황은 로맨스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며, 여주인공의 품위가 끔찍하게 손상된다는 점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만약 이게 평범한 삶에서도 새로운 일이라면, 터무니없는 상상을 펼친 책임은 전적으로 작가인 나의 몫이 될 것이다.” 라는 문장 등으로 나타낸다. 이는 당시 상업 문학들이 고딕 분위기의 추리, 스릴러물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비판하는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이며 캐서린의 취미가 고딕 소설 읽기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 취미가 결정적인 순간에서 사랑의 위기를 불러오기도 한다. 고루한 소설의 유행이 불러온 균열일테다. 소설의 ‘소설적인’ 관습을 타파하였기에 현실성이 높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 작품에서 타파되는 소설의 관습, 그것은 공상으로 쌓아 올린 공허한 허구이다.

두 번째로 그녀는 ‘영국 상류층 문화와 사교계의 관습’을 비꼰다. 이 관습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는 캐서린과 우정을 나누는 이사벨라이다. 이사벨라는 캐서린과 여러 면에서 잘 맞고 평생의 우정이라며 친분을 나누지만 허영 넘치고 내숭 떠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행동으로 결국 오해를 받아 캐서린의 오빠와 맺었던 약혼까지 무산되고, 캐서린 또한 거듭되는 이사벨라의 악의는 없지만 이중적인 태도에 실망한다. 당시 사교계의 관습은 주로 여성의 행실에 대한 규범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여성관의 조롱과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이를 확장하면 노생거 수도원을 페미니즘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소설 속 남주인공 헨리 틸니는 여성에게 굉장히 호의적이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배려하는 신사의 모습을 보인다. 다정한 남성 캐릭터 역시 우리나라의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 속 잘생긴 남주인공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페미니즘을 논할 때 남성 캐릭터가 예시로 등장하는 것이 낯설 수 있고, 그의 캐릭터가 매우 전형적이라 주목할 만한 특징을 발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이 1700년대 출생의 작가이며 아직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고 가부장적 분위기가 강한 사회에서 살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남자 주인공의 등장은 매우 신선한 것이다. 또한 여성 작가가 17세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집필한 이 소설은 여성 독자들의 공감을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사랑과 우정으로 고민하는 캐릭터가 현실성 있게 잘 짜여있다. 여자라면 태어나 한 번 쯤 꿈꿔볼 만한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몰입도 높게 써내 여성 독자에게 즐길 거리를 제공했다. 소설의 의무는 즐거움의 제공이다. 이 작품은 연애 소설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까지도 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제인 오스틴의 공통된 주제 “결혼과 돈”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수많은 로맨스물은 사랑만 있다면 돈 따윈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주인공들의 대사로 가득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제인 오스틴은 모든 그녀의 작품에서 사랑과 돈의 대립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방해요소는 기이한 출생의 비밀이 아니라 그녀의 재산이 된다. 헨리 틸니의 아버지는 캐서린이 보잘 것 없는 집안이라며 사랑을 반대한다. 캐서린 역시 틸니 같은 사람은 자신보다 부유하고 훨씬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해야 마땅하다며 의기소침한 모습을 종종 보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소설의 결말은 사랑과 돈의 적절한 타협으로 행복하게 이루어진다. 오스틴의 다른 작품 <오만과 편견>에서 여주인공의 친구 샬롯은 자신의 많은 나이와 적은 재산에 타협하여 사랑없는 결혼을 하지만 합리적인 결과에 행복해하고 만족하며 살아간다. <이성과 감성>의 엘리너와 마리앤 자매는 남녀의 순수한 사랑만으로 가득한 행복한 결혼을 맺긴 하지만 사실 둘의 남편 모두 부유한 귀족이었다. 과연 결말 이후 10년, 20년 후에도 캐서린이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미지수지만 이러한 장치로 현실성을 높여준 것은 그녀가 능력 있는 작가라는 증거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 사랑의 타협

영미 문학에서 제인 오스틴 작품의 장르, 사조가 정확히 어디에 속하는 지 알지 못 한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낭만적 현실주의’ 라고 적은 것을 보았다. 그녀의 작품을 여러 편 읽어본 후라면 이 명명보다 더 그녀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할 수 있는 이름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관습을 비꼬되 그에 저항하지 않고, 그렇다고 순응하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그녀의 올곧은 시선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그 길이 사랑이라는 점, 그 길이 현실이라는 약도 위에 놓여 있다는 점, 오스틴은 그 지도를 들고 걷는 여행자이다. 그리고 여행의 끝은 언제나 집으로의 귀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