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번의 포성이 울리는 동안

프랑수아 트뤼포, <400번의 구타>(1959)

by Suzanne

*불문과 영화 미학 수업에서 제출한 영화 비평 과제입니다. 누벨바그의 선구자 트뤼포의 영화 미학에 대한 수업이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Faire les 400 coups’라는 불어 관용구에서 비롯하였다. ‘끊임없이 소란을 피우다’라는 의미로 17세기 라 로셸 공성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했다. 가톨릭 구교가 위그노를 억압하기 위하여 400발의 대포를 쏘는 동안 포위된 이들이 개의치 않고 축제를 즐겼다는 설이다. 이는 유명 인디밴드의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라는 노래 가사를 떠올리게 한다. 오래된 것, 기성의 것, 나이 많은 것들의 억압 속에서 새로운 것, 신생의 것, 어린 것들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이전에 우리 ‘청년’은 무엇이며 그 정체성은 우리가 무얼 하게 만드는가?


우리는 애정이 결핍된 자들이다.

주인공 앙투안 드와넬은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의해 출생 전말이 밝혀지기 전까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쾌하고 다정해 보이는 아비와 권위적이고 단호해 보이는 어미의 양육 태도의 균형은 조화로워 보인다. 실상은 다르다. 어미는 앙투안을 혼자 낳았고 미혼모인 자신을 받아들여 준 현재 남편과 결혼 후에도 다른 남자와 밀회를 즐긴다. 앙투안의 친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전부다. 앙투안에게 드와넬이라는 성을 준 남자가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이에게 충분히 설명하지도,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뿌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없다. 결국 그 자신은 근본 없는 존재가 되고, 뿌리 내리지 못하여, 불안정하다. 아비는 호방한 성격임은 분명하나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연인의 사생아에게 무심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웃음을 짓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가깝다. 이는 아이가 일탈을 거듭할수록 매정해지고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인물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앙투안의 양육자는 준비되지 않은 채 그를 세상에 불러낸 존재로 보인다. 에덴동산에 손을 뻗어 넣어 놀고 있는 천사를 끄집어낸 방해꾼이자 난봉꾼이다. 이는 앙투안이 제왕절개와 낙태에 관해 떠드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듣고 역겨움에 힘들어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모두 칼로 살을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작업이다. 의학의 발전으로나 가능한 행위로,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았을 때는 ‘나와서는 안 될 아이’를 세상에 꺼내는 작업이다.

어미는 아이의 보호자가 아니라 그를 거느리는 통솔자로 보인다. 아이와 말할 때는 줄곧 집안일을 시킬 때이다. 이는 그저 말을 뱉는 수준이므로 전혀 대화라고 볼 수 없다. 앙투안이 어머니의 명령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장면에서 들리는 음향은 아기의 울음소리이다. 집 밖에서 들리는 이 소리는 앙투안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방임된 아이임을 상징한다. 쓰레기가 집 밖에 버려지듯 앙투안은 가정과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성의 바다(La mer de mère)를 공허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클로즈업 샷을 보라, 그는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해안가까지 떠밀려왔다. 그러나 짜디짠 바닷물은 아무리 들이켜 마셔봤자 갈증만 키울 뿐이다. 그것이 느껴지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래서 우리는 성장을 거부한다. (1) 일탈 : 할 일 안 해버리기

앙투안은 자신을 막아서는 학교, 선생과 자신을 막아주지 않는 가정, 부모가 선사하는 억압에서 벗어나 파리 길거리로 나서는 일탈을 감행한다. 그곳에서 회오리치는 놀이기구를 만난다. 놀이기구는 그 자체로 혼돈과 혼란, 멈추지 못하고 달리는 청년을 전형적으로 상징한다. 놀이기구에는 안전띠도 없다. 놀이기구에 탄 앙투안은 몸이 붕 뜬 채 날아올라 기구의 벽에 달라붙어 있는다. 성장이 바른길로 인도되어 기존 사회 질서에 순응하여 안정감을 느끼는 모범 시민을 양성하는 행위라면 일탈은 성장 거부이다. 탈선이기 때문이다. 파리 길거리로 목적지 없이 배회하러 나서는 것은 성장 거부이다. 달성될 목표 없이 배회라는 과정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성장 거부이다. 지구 행성의 가장 핵심 규칙인 중력을 거슬러 스스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화면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길게 비춰준다. 영화를 보는 자까지도 어지러움을 느끼게끔 말이다. 그렇게 관객은 함께 주인공의 첫 일탈의 두근거림까지 직접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일탈 과정에서 어머니의 일탈인 ‘외도’도 맞이한다. 어린이에게 성숙한 어른으로서 안식처가 되어주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군상과 동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은 그 자체로 세계의 모순이다. 일탈을 통한 성장 거부는 세계의 모순을 맞닥뜨리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을 거부한다. (2) 유아 퇴행 : 할 일 없애 버리기

한밤중에 가출한 앙투안은 길거리에서 몰래 우유 한 병을 훔쳐 다 마신다. 우유(혹은 젖병)는 어린이의 상징이다. 앙투안은 여전히 어린이지만, 우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청소년이다. 우유는 아기로의 회귀, 즉 유아 퇴행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우유를 도둑질한 것부터가 나이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을 상징한다. 특히나 화면 속에서 본인의 몸집만 한 우유병을 열어 마시는 모습을 젖병을 빠는 신생아를 연상시킨다. 두 손으로 우유병을 꼭 잡고 고개를 치켜들어 꿀꺽이는 모습은 거의 컷의 분할 없이, 한 병을 다 마시는 동안 길게 상영된다. 또한 영화관이나 극장에 가는 취미가 있는 앙투안은 영유아들을 위한 인형극을 감상하러 가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인형극은 늑대가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발자크를 읽고 아폴리네르를 낭송하는 청소년이 관람하기에는 무척 유치해 보인다. 꽤 긴 시간 동안 카메라는 관객석을 가득 채운 아기들을 비춘다. 그 아기들은 타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듯 보인다. 사실적이고 거침없이 극에 대한 흥미, 두려움 등을 표정 짓고 꺄르륵 소리를 연신 낸다. 그들은 말보다는 울음과 웃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나이대로 보인다. 성장이 나이를 먹어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라면 유아 퇴행은 성장에 역행함으로써 성장을 거부한다.


그것은 우상에게 사랑을 바치기이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왜 애정결핍이 성장 거부라는 결과의 원인으로 작동하는가?’이겠다. 이는 성장 거부의 구체적 행위를 ‘시네필 되기’로 설정하면 해결된다. 애정이 결핍된 자는 그것을 채울 수 있기를 영원히 갈망한다. 부모의 양육 미숙으로 유년기에 겪은 애정결핍은 성인기에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영원히 그 빈 곳을 채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부모가 아닌 타인과 깊은 신뢰 관계를 맺고 그 상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거나 어리숙하게 굴며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재양육’이라고 표현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좋은 연인, 배우자, 친구 등을 만나 관계를 맺으면 재양육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외롭고 고독한 도시 파리에서 서로 재양육해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때 나는 주체적이고 스스로 재양육해줄 대상을 찾아나서야 한다. 이것이 20세기부터 등장한 ‘시네필 되기’, 보편적으로는 ‘오타쿠 되기’ 혹은 ‘덕질 하기’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오타쿠는 한 대상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 행위 자체가 굉장히 유아적이다. 성숙한 어른은 주위를 살피고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다고 하루 종일 할 수도 없고, 하기 싫다고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만사 제치고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극장에 스스로 갇혀 영화만 보는 행위가 성숙한 이의 일상인가? 의무와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욕구는 억압해야 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좋아하는 한 가지 대상에 온전히 몰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오타쿠가 되는 것은 재양육 행위이며 일탈과 유아 퇴행을 요구하므로 성장 거부이다.


이는 매체에 몰두하기로 구체화된다. - 시네필, 활자중독

매체에 몰두하기는 ‘덕질’이라는 두 글자로 축약된다. 덕질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게 마구 사랑을 표출하고, 대상 외의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 나는 것이다. 트뤼포는 엄청난 시네필이며 그의 영화가 문학과 영화에 대한 애정과 위대한 그 분야의 선배들에 대한 헌사, ‘오마주’의 미장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의 ‘덕질’을 앙투안이라는 인물의 행위에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다. 영화에서는 앙투안이 끊임없이 영화를 감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만큼이나 글도 중요한 대상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업 시간은 늘 문학 시간이다. 트뤼포는 소설가 발자크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앙투안은 발자크를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집안에 그의 재단을 만들었다가 말 그대로 ‘초가삼간을 홀랑 태워버릴 뻔’ 한다. 발자크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과제에서 그의 작품을 모사하기도 한다. 문학 선생은 아폴리네르의 시 ‘산토끼’를 수업한다. 아폴리네르는 상징주의적, 초현실주의적 전위시를 창작하며 현대 시의 문을 연 인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누벨바그의 선구자인 트뤼포가 선망하기에 충분한 매력의 대상이다. 또한 처벌받는 대부분의 이유도 글로 인해서이다. 앙투안은 벽에 선생을 비난하는 글을 쓰다가 벌받는다. 시 수업 중 한 학생이 필사가 잘되지 않자, 강박적으로 공책의 종이를 쉼 없이 찢는 장면은 클로즈업되어 오랫동안 관객의 눈에 머문다. 발자크 모사를 시도한 과제는 표절이라는 오명으로 교사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는다. 이렇듯 트뤼포는 자신에게 주어진 ‘영화’라는 무한한 놀이의 공간에서 개연성을 크게 떨어뜨리지만 않는다면 내가 사랑(덕질)하는 요소를 온갖 곳에 덕지덕지 발라 놓았다. 오히려 그것이 가장 개성을 드러내며 자전적 이야기의 의도치 않은 개연성과 상징이 되기도 한다. 글에 대한 애정은 더 나아가 인쇄소라는 장소와 타자기라는 물체로 구체화된다. 첫 가출을 감행한 앙투안은 인쇄소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인쇄물, 글자 찍힌 종이들 사이에 파묻혀 잠든다. 이곳은 따뜻하고 방랑이 시작되는 곳으로 앙투안의 독립이 시도되는 곳이다. 타자기는 활자를 찍어내는 기계로, 타자기를 훔치다 걸려 구치소에 가게 되는 장면은 영화의 가장 위기 부분으로 부모가 완전히 앙투안을 버리는 계기이기도 하다. 당시 사회상에서 타자기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판매되는 물건으로 귀중품이며 까다롭게 관리되는 물건이었다. 훔친 타자기를 팔아넘기는 것에 실패하고 다시 들고 오다가 힘들어 친구 르네와 싸우는 장면은 글자를 찍어내는 것, 창작에 대한 부담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성장이 아니다.

청년에게 성장은 단지 성취되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만 것일 뿐, 의무와 책임이 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빈 애정을 채울 것, 그 애정을 채우기 위해 일단 성장을 유보할 것, 그 방법으로 일탈과 유아 퇴행을 사용할 것, 그런 후 스스로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찾아 그것에 몰두할 것. 이것이 바로 ‘오타쿠 되기’의 가장 세련된 정의가 아닐까? 성장이 성취된다면 청년기를 졸업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현대적 의미의 청년은 결핍된 애정을 갈구하는 존재이다. 다만 이다음에 올 질문은 바로 ‘성장 거부는 자기 파괴적이어야만 하는가?’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성장 거부의 부산물은 창조적 예술이다. 질문의 대상이 그 단 한 사람 자체라면 자기 파괴적이고, 그의 창작물과 그를 동일시하여 창작물을 그에 포함한다면 자기 파괴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