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 파트라를 벗어던지고

아녜스 바르다,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 (5 à 7 de Cléo)

by Suzanne

*불문과 영화 미학 수업에서 제출한 영화 비평 과제입니다. 파리 좌안파 영화 미학과 아녜스 바르다에 대한 수업이었습니다.


지난한 여성의 상징에서 태어나며

많은 문학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남성의 존속을 위협하는 ‘팜므 파탈’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클레오의 바쁜 애인이나 친구들이 그녀를 본명인 ‘플로랑스’ 대신 ‘클레오파트라’, ‘클레오’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클레오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성을 유혹하여 곤경에 빠뜨리거나 자신의 운명에 반항하며 주체적으로 길을 개척하는 인물이 아니다. 61년 6월 21일 늦은 오후의 2시간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어 보이지만 그녀가 자신의 시선과 이름을 되찾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온전히 따라가며 바르다는 클레오를 감싼 옷가지들을 벗겨낸다. 마침내 그녀를 무언가 가미되지 않아 그 몸의 굴곡과 살결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상태로, 나체의 순수함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 순수함의 빛깔은 티없이 맑은 하얀색이 아니다. 순백의 세계를 뒤집어 쓰고 있던 그녀를 암흑이 덮치고, 그녀는 환상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진입한다. 그 일상에서 진정으로 그녀 자신이 되기 시작한다.


순백의 드레스의 시간

영화는 클레오가 새하얀 옷을 입는 시간, 새카만 옷을 입는 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처음 클레오는 커다란 점박이가 박힌 하얀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다. 그 드레스는 앞이 갈라지며 덧댄 새카만 치맛자락이 보인다. 하얀색 옷은 얼룩이 튀면 눈에 잘 띄고 제거하기도 힘들어 관리하기 까다롭기에 입거나 관리할 때 섬세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환하고 눈에 잘 띄는 색이다. 그만큼 하얀 옷은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지는 자신을 신경을 쓰는 클레오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하얀 치맛자락 안에 덧대어진 검은 치맛자락은 클레오 내면의 죽음과 파멸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듯 하다. 그 공포는 어느 실존주의자가 말한 것처럼 실존에 앞서 그녀의 본질, 주체성을 발견하게 할지도 모른다.

오프닝 장면은 타로점 카드로 시작한다. 클레오는 저녁에 의사에게 들을 자신의 건강 검진 결과가 두렵다. 예언자는 클레오의 운명을 타로로 알려준다. 클레오는 눈물을 그렁그렁 흘리며 자신의 불길한 미래에 대하여 괴로워하고 있다. 당신의 앞날이 좋지 않다는 예언자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클레오는 미신에 약하다. 자신의 의지와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그녀는 암에 걸려 죽을 운명을 예고 받았다. 그 방에서 나오는 길은 나선형의 굽이치는 계단으로 내려오며, 화면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로 구성된다. 계단의 끝에서는 두 개의 거울이 마주 보고 클레오를 무한으로 반사하며 심오하고 아득한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클레오의 심리를 보여준다. 거울 앞에서 클레오는 죽음과 추함에 대하여 말한다. 누구나 병과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아직 발생하지 않은, 그리고 발생할 것이라는 근거가 부족한 일에 클레오만큼 과도하게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암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여 있는 와중에도 클레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병과 죽음마저도 그녀를 추하게 만드는 상태라는 인식 때문에 혐오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주인공의 행위는 유모와 함께 쇼핑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클레오는 가게에서 새 모자를 착용해 보며 계속해서 거울을 본다. 거울 보기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거울은 왜곡이 있고, 실제 모습과 차이가 생긴다. 역설적으로 진실된 나를 보기 위해서는 거울을 보면 안 된다. 거울 속의 자기는 꾸며진 거짓 자기일 확률이 높다. 가게에 있는 모자들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하고 비일상적이어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결국 그녀가 너무나 예쁘다고 말하며 구매하는 모자는 심지어 한겨울에나 쓸 법한 털모자이다.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다.

쇼핑을 마친 후 돌아오는 집의 인테리어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방 안은 새하얗고 가구가 거의 없이 텅 비어 허전하다. 내부는 나무 바닥을 가진 일반적인 다세대 주택의 구조인데 가구들은 그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과장된 빈티지 스타일이다. 가구들 간의 거리도 매우 멀리 떨어져 분리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가정집보다 ‘스튜디오’에 가까워 보인다. 보여지는 삶에 초점을 맞추는 장소라는 것이다. 이 장소에서 클레오가 갈아입는 실내복은 레이스가 달린 섹슈얼한 슬립과 파티 연회복처럼 과장되고 화려한 로브이다. 실크로 되어 목덜미에 털이 복슬복슬 달려 있는 로브는 흡사 ‘쇼걸’을 연상시킨다. 이 옷을 입고 연인을 맞이할 때 나오는 음악도 주목해볼 법 하다. 격식 있고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며 우아하고 부드럽게 연인을 맞이한다. 뜬금없이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클레오의 행위가 꾸며지고 연출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연인을 맞이하기 직전까지도 클레오는 아파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픈 여자는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옷을 입고 건강에 별로 도움 되지 않아 보이는 철봉 운동을 하고, 나를 클레오파트라라고 부르며 떠받들지만 정작 함께 할 시간은 5분도 없는 애인을 안아주고, 유머러스한 작곡가 듀오와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픈 노래를 부르는 장면 역시 매우 극적으로 연출된다. 클레오 방의 구석에 걸린 검은 커튼을 배경으로, 마치 암흑의 공간에 클레오만 존재하는 것처럼 화면은 클레오의 얼굴로 꽉 찬다. 새카만 배경은 이제까지 순백색과 빛이 가득했던 클레오를 덮쳐 새로운 세계로 데려갈 것만 같다. 흡사 극중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 슬픈 노래는 뜬금없이 감정이 북받쳐 오르게 하여 클레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말을 외치게 한다. 그녀는 그대로 새카만 커튼 뒤로 뛰쳐 들어갔다가 새카만 드레스로 갈아입고, 가발을 벗어 던지고 나온다.


클레오 눈에 쓰인 안대 - 유모

바르다는 유모를 클레오가 의존하는, 타인의 시선을 대변하는 자아로 사용한다. 유모는 자신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클레오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그에 대한 상황 설명이나 해설을 할 뿐이다. 클레오 자신의 시선을 자꾸만 가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답변을 내놓는다. 2장에서 클레오는 카페로 가서 유모를 만나, 자신이 실제로 큰 병을 의심할 만큼 아픈지 스스로 고민하지 않은 채 ‘아파 보이냐’라고 질문한다. 내 상태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어떠한 지 남에게 묻는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듣지 못 하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마저도 유모의 판단에 의지한다. 동시에 유모는 관객이 클레오의 우울에 동화되어 무거운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유모는 클레오의 감정 상태나 행동을 나레이션 형태로 해설하며 관객이 클레오가 철없고 감정적인, 생각 없는 ‘여자’로 보이게 한다. 관객과 인물 간의 거리두기를 조장하여 서술의 객관성을 유지한다. 함께 쇼핑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것이 아름답고 별로인지 계속 말하고 클레오는 그것을 따른다. 또한 온갖 미신적인 행동을 하도록 클레오에게 지시한다. 그녀가 미신을 믿는 것은 유모의 영향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유모는 작품의 초반부터 중반까지 클레오의 옆에 꼭 붙어 다니다 완전히 분리되어 사라지는데, 그 균열의 시작은 5장이다. 5장에서 무관심한 애인이 떠나간 후 클레오는 그네에, 유모는 흔들의자에 앉아 서로를 등진 채 흔들리는 몸으로 대화를 한다. 클레오는 애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의문을 품지만 유모는 그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므로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대답한다. 질문과 대답이 어긋나고 클레오는 유모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유모의 생각과 분리하여 자신만의 주체성을 갖기 위한 태동이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외출한 이후 영화에서 더 이상 유모는 등장하지 않는다. 클레오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어 던졌다.


암흑의 드레스로 다시 태어난 시간

오프닝 장면의 타로점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카드를 뽑자, 예언자는 그것이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함을 알려준다. 검은 커튼 뒤에서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는 장례를 치르고 클레오는 다시 태어난다. 새로운 삶에서 그녀는 자신의 눈을 되찾는다. 그대로 집을 빠져나와 인파가 붐비는 파리 시내 한복판으로 나선다. 이전까지 클레오가 있던 공간은 굉장히 사적인 실내 공간들이었다. 한 공간에 많아야 서너 명의 인물이 모여 대화를 하였고, 그나마 사람이 붐비던 카페에서도 테이블에 앉아서 유모와 대화했다. 공간을 이동할 때는 택시를 탔다. 이전까지 앵글에서는 대부분 클레오가 3인칭 시점으로 비추어졌다. 이는 다큐멘터리 화면처럼 연출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카메라는 클레오의 1인칭 시점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클레오의 시선이 된다. 탁 트인 외부에서 사람이 가득 모인 군중 속을 헤치고 들어간다. 카페에서 옆 테이블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으며 브랜디를 마시고 다시 거리로 나오자, 이제는 사람들이 클레오(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의식 속에서 사람들의 가짜 시선이 아닌 진짜 시선이다. 클레오와 표정과 몸짓에는 묘한 자신감이 드러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클레오는 작업실을 방문해 인체 조각의 누드모델을 하는 오랜 친구를 만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그 모습을 묘사하도록 하는 친구의 직업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친구는 이것이 성적인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며 인체의 고유한 미를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소개한다. 친구와의 만남은 클레오가 이전까지 갖고 있던 사고 체계를 하나씩 반박하며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안내자가 되어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가방을 떨어뜨리며 손거울이 깨졌기에 이제 클레오는 거울 속에서 더 이상 가짜 자기를 찾지 못한다. 거울이 깨진 것에 대해 클레오는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하지만 친구는 그저 실수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인물이 미신을 거울과 함께 깨뜨렸다. 이후 클레오는 친구와 친구의 애인이 일하는 영사실로 가서 짧은 무성 코미디 영화를 시청한다. 영화의 대사는 클레오의 관점이 이미 ‘나체는 외설적이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친구와 헤어진 후 공원에서 클레오는 앙투안이라는 새로운 남자를 우연히 만난다. 그는 애정 공세를 하며 ‘여름의 신 플로라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에게 마음을 연 클레오는 자신의 본명이 ‘플로랑스’임을 밝힌다. 앙투안은 클레오와 함께 의사에게 가주겠다고 하고, 둘은 이동 수단으로 붐비는 초저녁의 버스를 고른다. 버스 안에서 둘은 나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클레오는 나체는 종잡을 수 없고 통제 불가하기에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하지만 앙투안은 나체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클레오의 말에 반박한다. 화면 속의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고, 그 뒤로 버스 창틀 안에 담긴 파리 시내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토록 불안에 떤 죽을 목숨의 운명이라는 것이 무색하게도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화학치료만 조금 받으면 문제 없다는 말을 전하고 사라진다. 진료실도 아닌 병원 앞길 위에서,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말이다. 이는 예언가의 저주가 얼마나 허상이었는지 비웃는 듯하다. 이어지는 엔딩씬은 담백한 일상 대화이다. 병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는 나를 따라오겠다고 말한다, 내 진짜 이름을 불러주면서.


운명을 미신으로 돌리며

이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만의 시선을 되찾아 주체성을 회복하는 영화로 볼 수 있다. 그 주체가 여성이고, 인물을 그려내는 감독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되기도 한다. 자칫 페미니즘 영화는 사회구조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지독한 억압과 차별에 대한 고발과 그에 대한 통쾌한 복수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틀에 갇힐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강렬한 욕망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건의 발단-전개-위기-해소로 이어지는 극적인 긴장감이 감돌지도 않는다. 주인공이 사는 세상과 그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매우 일상적이다. 그 속에서 나를 온전히 나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특히나 그럴 수 없던 이가 그 눈을 획득하는 것, 이것이 해방이고 자유이다. 특히나 여성의 몸이라는 물성을 최대한 담백하게 그려내려는 시도는 인체의 순수성 확보로 이어진다. 또한 바르다는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라는 직관적인 제목, 영화의 전체 줄거리를 단 한 줄로 요약해버리는 제목을 붙였다. 이러한 제목은 문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사실적인 정보를 제시한다. 파리 좌안 영화라 불리는 그녀의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을 제목에도 적용한 것이다. 서사의 재현이 아닌 제시는 해석당하기를 거부하고 나를 바라보는 주도권의 회복으로 연결된다. 설화 속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몰락이라는 필연에 의한 굴욕적인 죽음을 피하고자 독사에게 물려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와 달리 클레오는 운명이라는 환상을 허무로 돌리면서 주체성을 되찾는다. 바르다가 제시한 현대적 여성의 주체성은 운명에 굴복하거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허상을 비웃으면서, 일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400번의 포성이 울리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