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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mothering - 4

by 서혜진 Jean Seo


부모의 경제적 지위에 따른 교육선택권이 분명한 교육적 ‘구별 짓기’를 보여주는 대한민국에서,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매개로 엄마의 교육적 ‘성향’은 ‘family Habitus’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미 살펴본 대로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가 개인이 가정 내에서의 ‘사회화’와 삶의 경험을 통해 습득하는 ‘성향’, ‘습관’, ‘취향’의 집합을 가리킨다면, 본질적으로 각 가정은 자녀의 기회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뚜렷한 ‘아비투스’를 가진다. 그 행위의 주된 행위자이자 아이의 ‘롤모델’로 따라가고 싶은 모방의 대상은 주 양육자이기 쉬운 엄마이다. 또한 엄마는 mothering이라는 구체적인 일상의 ‘선택’과 ‘행위’에 따라, 자녀의 사회화 과정을 통해 부모 세대에서 설정한 ‘Family habitus’인 가족의 취향, 성향, 경향성을 자녀에게 전달한다. 어떤 엄마로 어떤 ‘Family habitus’를 세워갈 건인지 먼저 정해야 하는 이유이다.






자녀의 발달연령별도 물론 가장 중요한 시기는 ‘유아기’일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엄마아빠의 모든 사랑을 위한 노력이 마치 자녀가 사춘기 이전에 다 소진되어 버린 듯하다는 점이다. 엄마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는 생애주기로 본다면 몇 번이나 더 있겠다. 하지만, 학벌을 중시하고, 마치 한 인간의 모든 역량을 대학입시 결과로 마감해 버리는 듯한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미루어볼 때, 자녀가 가장 힘들어하고, 가장 중요한 시기는 단연코 고등학교시절이다. 개인적 경험으로 볼 때, 아무리 공부를 하지 않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대학입시에 무관심하기는 쉽지 않은 대한민국이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대학을 아이들은 찾는다. ‘성인이 되면 뭐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 다시 시작하면, 너무 늦었죠?’라는 좌절을 넘어서, 무기력이라는 또 다른 산등성이를 느릿느릿 올라가는 아이도 있었다. 한편, 전교 1~2등을 계속하던 아이가 코로나에 걸린 이후로 갑자기 다시 공부를 할 자신이 없다며 학교도 안 가고 계속 잠만 잔다는 아이도 있었다. 엄마가 보기에는 한심해 보일런지도 모르는 이런 아이들이 개인적인 고민을 얘기하는 것을 들어 볼 때면, 안쓰럽고 할 말이 없다. ‘공부를 해도 해도 어차피 계속 그 자리인 것 같은데, 그만둘 수도 없어요. 그래서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란다. 그래서 스스로를 ‘좀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대안이 없는 엄마들은 그래서 또 사교육에 mothering을 위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악순환은 반복되고, 그 사이에 어느덧 자녀와 엄마는 더 이상 ‘한 팀’이 아닌, 나를 괴롭히는 ‘적수’가 되어 버린다.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는 비교적 안정적인 경향이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가정의 변화하는 상황이나 다른 문화적 영향에 대한 노출에 따라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는 변화와 발전을 하는 ‘생명체’와 같다. 그것은 가족이 살아가고 있는 더 큰 문화적, 사회적 환경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과 ‘퇴보’까지도 할 수 있다는 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아비투스’는 변한다. 다만,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엄마는 그 긴 시간이 걸리는 양육의 과정을 위한 ‘대원칙’을 잘 정한다면 그래도 잘해나갈 수 있다. 엄마 스스로가 결혼 전의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가 맘에 안들 수도 있고, 사회문화적, 경제적 여건이 좋은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를 만들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결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다음 세대인 자녀가 좋은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좋은 취향’을 가진 아빠, 엄마가 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지금이 ‘사춘기’이든, 아이랑 ‘데면데면’ 친밀함이 없어져버린 관계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을 그냥 넘기지 말자. 우선은 ‘공부해야 한다’라는 이유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넘겨버리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기를 다시 찾기가 어렵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감정적 상처’와 학업으로부터 생긴 ‘좌절감’ 위에 스스로의 ‘아비투스’를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사진: Unsplash의Kevin Delvecch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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