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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혜진 Jean Seo Sep 25. 2023

취향의 mothering – 6(끝)

항상 아이러니한 것은, 논문을 위한 인터뷰에서 만난 모든 중산층의 전업주부엄마들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여기는 과도한 사교육이, 만능 학생을 길러내기 위해 아이들의 숨 막히는 경쟁을 가정에서부터 유발한다는 사교육의 부정적 측면에 모두 동의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자녀의 학업적 성취를 통한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가정과 사교육에서 고도의 성취를 무작정 강조하다 보니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에도 한결같이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다’란다. 우선은 ‘내 아이 입시가 끝나야 한다’란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수집하고, 학습하지 않으면 현 대한민국의 대학입시에서 자녀의 대학입시에서는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라는 주장에 부인하기 쉬운 고등학생 엄마는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 여전히 엄마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그녀도 전형적인 한국의 중산층 엄마의 의견을 따르고 있었고, 여지없는 '인텐시브마더링'(Intensive Mothering)을 하고 있었다. 단지 사교육에만 아들을 몰아넣는 방식이 아니었다. 아들을 위해 기꺼이 모든 일상을 함께 했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집에 오는 시간에도 그녀는 자녀를 데리러 갔다 오기 위해, 1~2시까지 밤잠을 설치는 것은 '디폴트'값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금도 아이에게 이런 '노고'에 대해 짜증 한 번을 내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그동안의 엄마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인 듯, 그녀는 모든 측면의 mothering에서 완벽(?)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들의 학교성적을 보장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아 보였다. 빡빡한 살림에 주요 과목별 사교육은 한 개씩은 당연히 했고, 부족한 과목은 두 군데를 보냈다고 얘기했다. “외식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죠, 사실 사교육비 감당하려면 온 식구가 긴축해야 해요” 그녀의 가족들도 아들이 대학 갈 때까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누나 때에도 그랬으니까’가 아닐까 생각도 해봤다). 






아들도 처음에는 누나의 명문대입학에 동기부여가 되었는지 엄마의 열성에 적극 '호응'해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만큼 성적이 잘 나오지는 않았던 점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아들이 학업적으로 뛰어나지 않으면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투자한 시간과 경쟁적인 교육 환경의 극단적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느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에게 이러한 속내를 비춰본 적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던 것은 고1 입학 후, 첫 중간고사 시험 결과가 나온 직후부터였다고 했다.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보겠다는 고집을 피웠다고 했다. 학교 내신에서 1학년 첫 시험에서 주요 과목에서 5등급(서술형에서의 부분점수가 없는 학과 선생님의 채점방식 때문이었다고 했다)을 한 개, 3등급을 2개나 받았다고 얘기했다. 그 어렵다는 문제는 모두 맞혔는데, 남들은 거저 가져간다는 기본 개념문제에서 실수가 너무 많았던 아쉬운 시험이라 엄마도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SKY와 ‘의대’만을 목표로 공부했던 아들에겐 어처구니없는 결과였고, 공부의 의욕을 상실한 아들이 ‘정시’로 수능시험을 봐서 대학을 진학하고 싶다며, ‘수능시험 봐서 대학 가야 할 점수이지 않느냐, 수능을 볼 것인데, 왜 내신공부를 하면서 시간낭비를 하느냐고, 학교를 다닐 필요를 못 느낀다’라는 설명이었다고 했다. (이 또한, 현 고등학교에서 매해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사건이다)





논문 마지막 인터뷰를 위해 6개월 만에 만난 이 엄마는 ‘무기력하다’는 토로를 한다. 이유 인즉은, 아들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고, 본인도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했다. 아빠는 아들의 학교 자퇴에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아들은 요즘은 공부도 손을 놓았는지 아무 생각이 없는 아이처럼 방에만 들어가 있다고 했다. 이쯤 되니, 스스로의 mothering에서의 방향을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가 무능력한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고, 그 사이에 아들과 남편과의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했다. 너무 일찍 결과를 내버리는 듯한 현재의 ‘내신’ 위주의 대학입시는 최상위권 학생들에겐 마치 복구불가능한 듯한 ‘최후통첩’과 같다.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다양한 교육 관련 정보를 찾아보며 학습하고, 대학과 사교육에서 실시하는 입시설명회에도 빠짐없이 챙기며 다녔던 엄마의 노력도 너무 일찍 결론이 나는 방식이다.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이러한 현상을 비일비재하다. 






성과중심의 mothering문화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때로는 양육에서 성취할 수 있는 목표를 너무 높게 잡는 경우가 양산해 내는 부작용이 사회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자녀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mothering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들은 스스로가 인정하는 인텐시브마더링의 방식을 하고 있는 다른 주변의 엄마들에게 mothering의 방식을 듣고 자녀에게 ‘방심’했었던 시간에 후회하기도 한다. 유튜브 등의 교육법등을 들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mothering을 비교하고, 자기 회의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뒤늦은 mothering은 너무 늦었다는 두려움의 순환에 갇혀 있는 듯했다. 여기서 파생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에 매몰되기도 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녀의 ‘성적’ 때문에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느끼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틀속에 갇힌 다람쥐는 계속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엄마에게 의무로 다가가는 자녀 교육을 위한 ‘마더링 튜토리얼(mothering Tutorial; 자녀 양육 설명서)’은 온통 ‘교육’ 일색이다. ‘취향’을 꿈꾸기 힘든, ‘무취향’을 강제하는 한국사회에서 ‘사교육’이 10대 청소년의 mothering을 '천하통일'을 한지는 이미 너무 오래다. 학벌을 위한 Mothering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압박감은 엄마 혼자 거부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엄마 스스로가 자신이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불안감과 죄책감이 커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엄마의 사회, 문화적 요구는 자녀의 교육을 위한 mothering이 ‘아이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유서 깊은 관행’이 된 것은 ‘오래된 현실’이다.    (감사합니다)



사진: Unsplash의 Barthelemy Rig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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