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사고가 교육과 ‘마더링’의 영역을 침하(沈下)하기 시작한 지는 이미 너무 오래다. 전방위적인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만연(蔓延)은 시장 관계를 교육과 ‘마더링’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 왔다. 소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던 교육과 마더링의 영역이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상품'인 '서비스 재화(財貨)'가 된 지 오래다. 어쩌면, 한국의 '대표 재화'가 된 듯하다. 진취적인 개별 ‘마더링’은 '교육전문 마더링’으로 축하하며, 바로 상품화되어 시장에 등장한다. (‘엄마표영어’나, ‘자기주도학습’으로 성공한 엄마의 ‘마더링비법’의 상품화는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심지어 사교육 없이 자녀들을 서울대에 보낸 엄마의 아들들이 ‘사교육’ 업체를 차린 후, ‘자기주도학습’을 위주로 했던 엄마의 ‘마더링’의 장점을 홍보하고 '상품화'하는 ‘웃픈 현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의 대부분은 엄마의 교육적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도록 ‘돕겠다’라는 이타적 의도로 출발한다. 가정의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교육을 위한 전략적 선택의 자원으로 전환하게 돕겠다는 목적을 표명한다. (이런 모든 목적이나 선전이 모두 ‘틀리다’이거나 ‘옳다’라는 가치 판단이나 비난을 여기서 하고 싶다는 의지가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결국엔, 이러한 ‘이타적 시도’ 자체가 또 다른 ‘상품화’로 가는 결과를 만들어버리는 한국사회의 현재의 모습에서 우리 엄마들의 ‘마더링’을 둘러싼 어려움과 여지없는 '시장의 발 빠른 대응'을 주목했다. 최근에는 ‘유튜브’를 위주로 날로 다양해지고 그 수도 날로 증가하며 맹위(猛威)를 떨치고 있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경제 및 정치적 이론과 정책의 한 형태로, 개별 자유와 시장 경제를 강조하며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경제 활동을 자율적인 ‘시장의 손에 맡긴다' 접근 방식을 나타난다. 이러한 이론은 20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많은 국가에서 경제 정책의 중심 요소로 사용되었다. 한국사회도 별 이견(異見) 없이 이러한 시대적 사조(思潮)에 편승한 정책을 쏟아냈었다. 사실, '신자유주의’ 사고의 초석은 개인을 ‘생산성 있는 기업’으로 여긴다. 공장에서 쓸모 있는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듯이, 개인도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스스로 책임지고 생산성 있는 존재로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 시장 경제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경제 활동에만 적용될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부분을 자율적인 시장 기능에 의존하도록 맡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철학으로 '기꺼이' 수용된다.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정부 개입을 경제 활동의 제약으로 여긴다. 이는 정부 규제와 세금을 낮추고, 경제적 활동에 대한 제한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경제 성장과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자유주의'는 경쟁이 생산성을 촉진하며, 더 나은 경제적 결과를 창출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론적으로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강조한다. 경제적 선택을 기업의 자유와 권리로 보장해야 한다는 기조와 같은 방식으로, 개인의 경제 활동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결정(양육, 교육, 마더링 등이 모두 포함된다)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제한을 최소화하고 '개인'과 '가정'에 위임한다. 자유를 보장했으니, 결과는 개인이 책임진다는 것이 합리적인 '논리'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원리가 고스란히 한국의 '사교육 시장'에서 상품화되고 왕성한 생산과 판매의 과정으로 '교육'을 위한 '마더링'에서 거래된다.
이렇게 교육과 양육의 방식을 통제하며 가정으로 들어온 경제원리인 ‘신자유주의’는, 한 사회 내에서 체계적인 불평등과 구조적 문제를 양산한다. 또한, 선택의 주체인 개인과 가정은 이러한 사회에 맞서기보다는 “개인의 책임과 개인적 변화”에 본질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결국 개인이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언듯 합리적으로 보이는 ‘나레이티브’에 순응하느라 '번잡'하다. 결과로써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가 교육과 '마더링'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내 아이를 적자(適者)로 교육이라는 전쟁터에서 생존(生存)시키기 위한 '엄마의 무기는 '경제력'과 '정보'로 무장한 마더링이다'라는 메시지는 너무나 강렬하다. '입시'를 위한 교육영역에서 '사교육'을 통한 마더링은 이렇게 규범화된다. 사실, '신자유주의'식 논리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정의'라던가, '이타적 태도', '공동체 의식' 따위가 발 붙일 자리가 없다.
이러한 사회적 기조에서 자녀의 '실패한 입시'는 당연히 '실패한 엄마'라는 등식이다.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엄마는, 자녀의 입시결과로 '평가절하'된 엄마 자신의 위상과 흐릿해진 정체성을 두려워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자녀의 입시전쟁을 위한 '군수품'과 '전력무기'로서의 '사교육'에의 엄마들의 의지(依支)를 넘어선 귀의(歸依)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치열한 교육에서의 '능력 있는 엄마'는 결국 '능력있는 자녀'라는 등식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교육/입시 전쟁에서 분투 중인 자녀를 위한 이 시대의 엄마들의 '각자 살 길을 찾는 방법'이 '사교육'을 통한 '각자도생(各自圖生) 마더링'이 아닐까? 한국의 인텐시브마더링이 이렇게 '사교육'을 '디폴트값'으로 해야만 해 볼만한 무언가가 된 배경에는 단지 '학벌사회'라는 흔한 명제만 있는 것이 아닌 듯한 이유다.
한 엄마로부터 들었던 '우등생' 고등학생 딸아이가 했다는 말이 인상 깊다. 우리나라가 '학벌사회'라는 말을 하지만, 왜 어른들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평가하는지, 회사에서 우수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더 좋게 생각하는지를 알 것 같다고 했단다. 고등학생 때 전교 4%를 들어야 갈 수 있는 대학들인데, 그 정도의 성적을 받으려면 그 어린 학생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안 하고, 그 빡빡한 일정 속에서 심적 부담을 다 견뎌내는 학습의 과정을 견뎌내고 결국 최상위 대학에 합격한 것 아니냐는 논리였다. 연령 대비 그 인내심을 통한 결실이 입시결과라는 사실만 보아도 이미 뛰어난 아이들이란다. 동의가 된다. '올바른 선택과 올바른 성향이 채택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환상을 장려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의 생각은 당연히 여기에 동의할 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교육의 영역으로의 침범(侵犯)은 '마더링'과 연관해 볼 때 더욱 다양한 의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일부는 '자본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강화한다'며 긍정적인 부분을 주장한다. 한편, '부의 불평등을 증가시킨다'라며 부정적인 면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개념이 교육과 마더링(mothering)의 영역으로 자꾸 침범해 들어오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경각심은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회현상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은 이 시대 '한국에서 엄마로 살기'위해 분투하는 여성들과 다음 시대의 한국을 살아갈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가정'이 힘들어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힘든 가정'을 경험한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결혼에 대한 환상을 너무 일찍 해보지도 않고 스스로 부숴버린다. '저출산'은 어느 한 세대의, 단지 여성 개개인의 사고의 '진화'의 산물이 아닌 듯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게다가, 작금(昨今)의 한국 사회에서 모든 아이들이 살벌하고 '장황한' 교육경쟁에서 스스로가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지도 못하다. 당연히, 모두가 ‘전심전력’의 교육적 ‘마더링’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니다. 현재의 입시제도 하에서는 부모의 영향력(경제력, 학벌, 거주하는 지역, 정보력 등)에 따라서 자녀의 입시의 유불리가 나누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엄마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진리(眞理)가 된 지 오래다. 마찬가지로, 이미 여러 번 다루었듯이 전업주부의 중산층의 마더링에서도 교육적 성과로 살펴본 '마더링'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이 발견된다. 결국, '각자도생 마더링'의 승패는 복불복(福不福), 즉, 케바케(case by case)라는 것이 더 일반화하기 쉬워 보이기까지 하다. '신자유주의식 교육제도' 하에서의 '각자도생 마더링'이라는 전제(前提)라면, 우리 사회의 어딘가로부터 끊임없이 들리는, 교육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아우성'과 ‘볼멘소리’는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대문사진: Unsplash의 Tobias Rademac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