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혜진 Jean Seo Oct 08. 2023

교육열과 마더링의 '향연'

 한국 사회에서 'education fever’(교육열) 특유의 강렬함이 높은 수준의 학교 교육을 받기 위한 치열한 '사교육'과 경쟁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하겠다. 대학입시를 향한 ‘사교육’ 서비스의 ‘진화’는 보다 이른 ‘유년기’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재수와 ‘삼수’, ‘편입’등으로까지 확장된다. 연령에 따른 교육서비스의 전문화와 확대는 다음세대의 교육적 투자를 위한 가족 재정의 고부담으로 사회문제의 주요 화두가 된 지 이미 너무 오래다. ‘교육의 시장화’(marketisation in education)가 극대화됨에 따라 학교 교육에서 ‘마더링’의 중요성은 이미 한국의 미디어와 대중 담론에 너무 자주 반영된다. 이러한 사회적 빈번한 ‘마더링’의 중요성에 대한 담론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엄마의 역할의 중요성을 너무 많이 강조한다는 것이다. 너나 할 것 없는 결론은 자녀의 학업적 성취에서 ‘엄마’의 존재와 개입이 필수적임을 결론 내고 끝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엄마들은 자녀 양육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사교육’으로의 '올인'을 통해서라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규범적이고 인텐시브한 마더링 스타일의 이미지를 덧입기를 희망한다. 엄마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도 복잡 다양한, 또한 ‘지루하다’ 못해 ‘아득한’ 과정인 자녀의 대학입시까지의 '마더링'의 과정을 듣는 것, 보는 것만으로도 출산도 하지 않은 여성들은 벌써 숨이 턱턱 막힌다. 반면,  ‘사교육’의 현란한 수사(修辭)는 ‘신뢰’할 만하고, 그들이 담보하는 결과는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자녀교육의 과정과 성공으로 가는 ‘열쇠’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환영(幻影)을 제공하기에 너무나 충분해 보이기 쉽다. 





 

소위, 자녀의 대학 입시에서 성공한(?) ‘아카데믹 맘’, '매니저 맘'이라는 '선배'엄마들의 '인텐시브 마더링'의 무용담(武勇談)을 듣고는 사실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아무나 못한다'고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엄마들은 중, 고등학교 학교 성적부터 마지막 대학입시성적까지의 모든 과정 내내, 사교육을 통한 '인텐시브 마더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에 ‘나 몰라라’, 또는 '난 달라'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한국사회에서 자녀의 성취를 엄마의 성취로 여기는 인식은 여전히 만연하다. 이런 문화 속에서 가정의 경제적 능력에 기대어 자녀의 대학 입학시험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허용되는 분위기가 당연 해지는 분위기이다. 중요한 mothering 수단으로써, ‘가족 자본의 아낌없는 투자’를 통해 사교육의 ‘올인’으로 이루어 낸 자녀의 교육적 성취는 장장 10년에 걸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렇지 못한 가정 형편에 상대적 ‘박탈감’과 '무기력'을 느끼게 한다. 

 




드라마나 뉴스가 전하는 ‘마더링’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너무 자극적이고 극단적이다. 소위, '극성맞은 엄마'로 묘사되는 이 시대의 엄마들을 자녀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제물로 삼는 ‘마녀’로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더불어, 이들의 열성에 동역(同役)하는 ‘사교육’의 ‘악마화’는 전형적이고 너무 흔한 '클리셰'이다. 그러나 실제 엄마들이 모두 다 스스로를 그렇게 능력 있거나 자녀교육에 확신에 찬 존재로서 여기지도 않을뿐더러, 그녀들은 그냥 ‘엄마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에 순응하는 ‘취약한’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또 그런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이 실제 삶에서 없지는 않다는 점도 무시하지는 못하겠다. 그러고 보면, 극단적인 묘사로 보이는 드라마의 어느 한 단편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한국의 우리네 엄마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너무 일반적인 광경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에 기대어보아도 사교육 현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엄마들은 ‘대동소이’했다.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살인’할 정도나, 결국에는 누구네 집 아이가 ‘자살’을 해버리는 ‘극적’ 장치가 없을 뿐이다. 스스로를 주변의 다른 엄마의 양육 방식과 비교하는 것은 기본이다. 더욱 ‘빡세게’ 아이들을 돌려서 ‘엄마가 원하는 결과’를 위해 (또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사교육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로고스’를 무시하기도 힘든데, 자녀들이 이런 엄마를 돕지(?) 않는다는 푸념과 원망을 서로 나누며 오늘을 또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그래서인가? 속해 있는 공동체(전업주부에겐 주로 ‘학부모 모임’이기가 쉽긴 하다)의 엄마들과의 교류가 중요한 ‘일’이자 ‘마더링’ 중 하나다. 그러고 보면, 모든 아이들 공부와 동네 돌아가는 사정을 들을 수 있는 ‘빨래터’ 역할이 바로 이 ‘맘 모임’이다. 엄마들끼리의 ‘이너써클’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매일 통화는 기본이고, 주기적으로 모여서 입시설명회등 새로 생긴 학원 순례도 모두 업무처럼 성실하고 진심이다. 사실, 아이들이 학령기가 끝난 이후에도 만남이 지속되는 찐 엄마들의 ‘친목 모임’과 결국의 ‘인생 친구’가 되는 경우도 왕왕 본다. 그 시작도 결국 자녀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 ‘마더링’에서부터가 많았다. 찐 ‘전우애’가 아닐까? 






영어에서 ‘향연’(banquet)은 일반적으로 결혼식, 기념일 또는 기타 중요한 행사와 같은 특별한 날을 축하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열리는 대규모 공식 식사 또는 잔치를 나타낸다. 본 식이 끝난 후에 가지는 편안하고 긴 담소의 ‘장’이다. 종종 여러 코스의 음식을 포함하며 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와 축하를 위한 이벤트이다. 한편,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일류 문화인들이 한 곳에 모여 사랑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한 대화에 대한 플라톤의 전기(前期) 저작의 하나인 책명이다. ‘마스터 키’가 없는 교육을 위한 ‘마더링’에 비슷한 고민으로 때로는 함께 위로하고,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또다시 함께 축하하고… 그렇게 각자의 ‘마스터키’라고 믿는 것들을 공유하는 이 시대 한국 엄마들의 삶의 궤적이 남겨준 ‘선물’이 바로 이 ‘맘 모임’이자 '찐 전우애(?)'이다. 길고 치열한 교육 전쟁의 ‘훈장’이 함께 이 시기를 잘 버티게 해 주었던 엄마들끼리의 ‘찐한 연대’로 만들어진 소소한 일상의 ‘향연’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해결을 희망하는 교육과 관련한 담론의 시작을 이 '향연'에서부터 시작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함께 나누는 ‘소그룹’에서의 담론이 보다 건강하다면, 더 큰 명제에의 접근법도 좀 더 건강하고 근본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작고 소소하지만 끈끈한 이 '맘 모임'에 더 건강한 생각들(나는 좀 거창하게 ‘마더링 철학’이라 불러본다)이 그득 차기를 소망해 본다. 

 


사진: Unsplash의 Alexandra Gornago

                                           (대문 사진: Unsplash의 Robert Vasquez)

작가의 이전글 '신자유주의'시대의 '각자도생' 마더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