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뽕’이라는 유행어가 놀라운 것은, 이 말이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대변했던 ‘헬조선’이라는 표현을 거의 완전히 대체했다는 사실이다.
목차
코로나 민주주의 ① '헬조선'에서 '국뽕'으로
코로나 민주주의 ② 코로나와 갈라파고스 증후군 (링크)
코로나 민주주의 ③ 코로나와 열린 사회 (링크)
코로나 민주주의 ④ 코로나 속 차별과 혐오
코로나 민주주의 ⑤ 보편적 연대와 코로나 민주주의
코로나 민주주의 ① '헬조선'에서 '국뽕'으로
‘국뽕’, 일단 즐겨도 좋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한국의 성공적 방역 모델에 대한 외신의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더욱 흔히 듣게 되는 단어가 바로 ‘국뽕’이다. 이 유행어에는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가 중첩돼 있다. 애국심 혹은 자긍심이라는 고상한 단어로는 전달될 수 없는 맥락이 있다. 한국이 자랑스럽다는 기본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비치는 한국의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으로 이 표현에는 밖에서 보내는 높은 평가에 도취된 채 현재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는 냉철한 시민 의식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이 만족감을 충분히 즐길 자격이 있다. 자부심을 느낄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떠올려 보자. 당시 한국에서 6개월 동안 186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메르스가 처음 발병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피해 규모였다. 메르스 사태는 2018년 10월 16일 0시에야 비로소 공식 종료됐다. 3년이라는 길고 긴 기간의 혼란과 공포는 집단 트라우마를 남겼다. 방역 시스템의 실패가 남긴 상처는 컸다. 뼈아프기도 했지만 값비싼 교훈이기도 했다. 2020년 코로나 19를 상대로 한 지금까지의 성공적인 방역은 과거의 쓰디쓴 실패를 딛고 이룬 것이기에 더욱 달콤하다.
시계를 5년 전 메르스 사태 당시로 돌려보자. 한국은 국제 사회의 매서운 비판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WHO와 미국의 뉴욕타임스, 독일의 타게스슈피겔 등은 방역 정책이 투명하기는커녕 비밀주의에 가깝고 비효율적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아직 위기 속에서 출구를 찾던 한국 정부와 사회가 그런 외부의 비판에 귀 기울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테다. 그럼에도 그 쓴 약을 삼켰다. 비판하던 이들이 이 사태를 잊고 있는 가운데 와신상담했다. 마지막 메르스 환자가 병상을 나섰어도 쉬지 않고 허술했던 부분이 무엇이었을지 하나하나 복기했다. 이를 통해 법규정을 손질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도록 의료 및 방역 시스템 전반을 업그레이드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메르스 백서를 발간했고, IT 전문가는 더 신속하게 감염경로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제안했다 (관련 독일기사). 투명성과 개방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어떻게 방역의 효율성과 결합시킬 수 있는지 고심했다.
바로 그 때문에 2019년 12월 17일에 이미 한국의 방역당국은 감염증 비상사태에 대한 모의 훈련을 실시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새로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성이 알려지기도 전의 시점이었다. 2020년 1월 20일 첫 국내 확진자가 생긴 후 불과 7일 만인 1월 27일 설 연휴 중임에도 질병관리본부는 민간 시약 개발업체 관계자를 만나 진단키트 개발을 각 사에 요청하며 동시에 긴급사용승인 계획을 전달했다. 이를 통해 당시 1일에 몇백 개 수준이었던 진단키트 생산량이 적시에 대폭 확대될 수 있었다. 같은 20일 첫 확진자가 생겼던 최강국 미국이 이후 보여준 실망스러운 대처와 막심한 피해 규모를 비교해보면, 한국의 성공이 얼마나 다행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인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서구의 코로나 대처에 대해서는 코로나 민주주의 ② 코로나와 갈라파고스 증후군에서 적습니다.)
헬조선에서 국뽕으로: 국뽕 현상 속의 성숙한 시민 의식
‘국뽕’이라는 문화적 현상에는 성숙한 시민사회의 조밀한 나이테가 드러난다
‘국뽕’이라는 유행어를 살펴볼 수록 놀라운 것은, 이 말이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대변했던 ‘헬조선’이라는 표현을 거의 완전히 대체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의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한국은 희망이 없는 헬조선 사회'란 명제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70%에 육박(67.8%)"하였다(링크). 과거, 사람들은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사실에 부합하느냐를 놓고 다투기도 했다. 그 표현을 기꺼이 썼건 안 썼건 간에, '헬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침울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에 비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국뽕' 현상에는 분명 새로운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존의 정치적 진영을 넘어 이 현상이 허상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점부터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코로나 시대에 새롭게 축적된 자부심이 ‘애국심’이라는 국가주의적 용어 대신 ‘국뽕’이라는 신조어에 담겼다는 점이다. 물론 향정신성의약품(?)을 연상시키는 이 말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현상을 곰곰이 들여다 보면, ‘국뽕에 취한다’라는 인터넷 상의 표현에는 평소보다 들떠있는 스스로 그리고 이 순간에 대한 의외로 냉철한 자기 인식이 보인다. 그 상태에 대해 유머스러운 거리두기를 하면서도, 한번 취해 볼 만할 잔치에 점잔을 빼지 않고 즐겨 주는 여유와 경쾌함이 있다. 서로에게 '국뽕에 주의하시오'라고 위트있게 말하지만, 국뽕에 너무 취해 자제력을 잃고 파티를 망치는 이들은 드물다.
이렇듯 한국의 시민들은 무비판적인 혹은 남이 강요하던 국가주의적 애국심과는 구분되는 성숙한 시민이 스스로에게 갖는 자긍심을 보여준다. 지나친 것 같으면 스스로 ‘주모, 취한다, 이제 그만~!’하고 외치는 장면은 정교한 방역 정책 이상으로 세련되었다. 적어도 이러한 의미에서 ‘국뽕’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앞으로도 두고 두고 곱씹어볼만한 문화적 현상이다. 여기에는 국가주의, 군사주의, 민주화의 굴곡을 거치며 자라난 시민사회의 튼튼한 나이테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국뽕’ 현상 속에는 우리 사회가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공동체적 자기 긍정이 담겨 있다. 물론 방향성을 잃은 거대한 에너지는 폭력적인 힘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국뽕의 취기가 사라지기 전에, 이 에너지를 무엇을 위해 써야 할 것이냐라는 질문을 마저 던지는 것이다. 위기가 지나갔을 때 다시 '헬조선'이 돌아오지 않으라는 보장은 없다. 과거로 되돌아 가지 않기 위한 변화의 기회를 이 위기 속에서 찾아야 한다. 남의 칭찬이 없어도 그 자체로 좋은,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어느 지점으로 향하기 위해서도, 이제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던져지는 과제, '코로나 민주주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코로나민주주의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
Dr. Yhee, Jean
Direktor, Institut Politik+Kultur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