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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브르박 Jan 18. 2021

[토목&하천] 한국의 5대강

강과 문명

세계의 4대문명


세계 문명의 발상지를 떠올리면  어디가 떠오르는가? 나일강의 이집트 문명, 황하의 중국 문명, 겐지스강의 인더스 문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 네 곳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학창시절 세계역사 시간에 배울때도 그렇게 배웠고. 


이들 문명은 대부분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옥한 토양을 기반으로 발달해왔으며, 인근에 커다란 강이 지나가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실 4대 문명의 발상은 오리엔탈리즘과 서구 중심적 사고라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존강에서 발현한 남아메리카의 문명이나, 다른 대륙들에서도 문명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러한 문명 발상의 중심에는 강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5대강은 한반도의 문명 발생에 어떻게 영향을 발생했는지 알아보려 한다. 


한국의 5대강

한강


우리나라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강은 삼국 시대에도 국력의 상징이 되며,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 되었었다. 그런 한강유역은 선사시대의 유물또한 각지에서 발견된다.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은 선사유적지로 대표적이다. 토기, 석기, 골각기 등이 발견되는 유적지로서 당시의 식생활 문화를 대표한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 등의 농경이 발달하였고, 민무늬토기가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서북지방 팽이토기 주민이 남하하여 동북계 민무늬토기인과 교류를 갖으며 남부지역까지 벼농사를 확산시키게 된다.


삼국시대에는 앞서 설명한 것 처럼 한강유역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경쟁하며 차지하기 위하여 성장하였다. 그 관심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우왕과 공양왕은 천도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천도는 조선 태조에 이르러 이루어진다. 한양은 지세가 훌륭하고, 군사적 방위에 있어서도 천연의 요새지이며, 조운을 통해 세곡을 운송할 수 있는 한강이 있어 도읍지로 최적지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세제개혁과 아울러 대동법이 실시되며 한강은 더욱 중요하게 되며, 전국에서 수납되는 대동미는 조운선을 통해 한강으로 운송된다.


한강유역은 근대에 접어들며 많은 변화를 보인다. 1900년대 한강철교가 근대식 최초의 철교로 건설되었으며, 최초의 인도교인 한강대교는 1916년에 건설된다. 한강에 증기선은 1888년 운항을 시작하였다. 


근대에 접어들며 가장 크게 변한 한강 유역은 '한강종합개발'이었다. 총 2차에 걸쳐 수행된 이 사업으로 인하여 밤섬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며, 현재의 잠실동와 신천동의 위치에 있었던 '부리도'라는 하중도가 사라지게 되었다. 남쪽의 섬을 육상화 하며, 아래쪽으로 흐르던 흐름을 폐쇄하여 현재의 석촌호수가 만들어 지게 되었다. 



낙동강


낙동강은 경상도 지역의 큰 동맥이다. 고대부터 이 지역의 인문지리를 발달시켜온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낙동강 유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경북 칠곡군 석적면의 돌망치 등 구석기유물과 울산시 울주군의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부산 영도 등에서 발견된 패총 등 다양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어 대동강 유역을 제외한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지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청동기 및 철기문화를 꽃 피운 지역으로 부족 국가로 만들어진 가야와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위치한 지역이다. 


경상도의 동, 서로 진한과 변한이 위치하여 낙동강을 중심으로 역사의 터전을 잡았다. 변한과 진한 지역은 상당한 철기문화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울산과 동래의 제철유지, 김해의 토기, 지석묘와 옹관묘 등에서 출토된 석검과 철검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김해 패총 등에서 출토된 탄화된 쌀은 이미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낙동강 유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 백제, 왜의 각축장이었다. 4세기까지 낙동강을 경계로 한 사로국은 신라의 핵심부분이 되어 삼국통일을 달성하였으며, 삼국통일로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신라는 지방행정구역을 9주5소경으로 개편하였으며, 낙동강 유역은 사벌주, 삼랑주, 강주의 3주로 나뉘게 된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일본과의 교통 무역의 요충지였으나 낙동강은 임진왜란과 6.25의 참상을 간직한 지역이기도 하다. 6.25 전쟁 당시 남하한 북한군을 최후에 방어하였던 지역이었으며, 서울 수복의 발판이 된 것도 이 지역 방어에 성공했기에 달성할 수 있었다. 


근래에 들어와서도 낙동강 유역에 위치한 산업단지 등은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활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금강


금강 유역은 구석기, 청동기를 비롯해 각 시대의 중요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중 대표적 선사시대 유적은 공주 석장리 유적이 있다. 이 곳은 '남한 최초의 구석기 유적'으로 구석기인들이 사용하던 외잘찌개, 자르개, 긁개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유적으로는 지난 76년 발굴된 부여 송국리 유적이 대표적이며, 원형과 방형의 주거지 및 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탄화미가 출토되 우리나라 벼농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 금강은 '백제문화'를 탄생시킨다. 한강유역에 자리했던 백제가 웅진과 사비로 도읍을 옮기며 백제문화는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금강은 그 백제 역사의 중심부로 급부상한다. 웅진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 공주 송산리 고분이 있다. 이곳의 무령왕릉은 백제고분으로 피장자가 확인된 유일한 고분이다. 

사비시대 백제유적으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있으며, 이 유적에는 총 7기의 고분이 있으며 이 중 동하총이라는 무덤에는 사신 및 연화문과 비운문이 남아 당시의 예술상을 보여준다. 


섬진강


섬진강 유역은 신석기 유적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기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지역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보다 넒은 지역에서 사람들이 거주하였고, 주변지역과 문화를 교류하였다. 섬진강 유역의 청동기 유물을 살펴보면 한반도 서쪽지역과 동쪽 지역의 문화가 동시에 나타나 일찍부터 문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초기 섬진강 유역은 마한과 변한의 영역이었고, 이후 백제로 편입된다.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던 백제는 4세기 중엽 근초고왕시대에 정복사업으로 남해안 지역에 으르고, 무령왕대에 섬진강 유역까지, 무왕대에 섬진강 유역 전체를 백제의 영향에 두게 된다. 

삼국 통일 이후 섬진강 유역은 9주5소경 중 완산주와 무진주에 속하게 되고, 통일신라 말 각 지방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을 때 견훤이 무진주 지역에서 시작하여 전주로 옮겨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영산강


영산강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생활의근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수량이 풍부한 영산강 유역은 수많은 지류가 나주 평야와 같은 기름진 토지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고 나주 지역은 선사시대유적 뿐만 아니라 옹관고분문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이 위치한다. 

영산강 유역은 고대사회에서 마한에 속하였으며, 그 이후 백제에 편입된다. 백제 멸망 이후 신라의 통일 이후 9주 중 발라주에 포함된다. 통일 신라 이후 이 지역은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속하게 된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시대에는 섬진 및 영산강 유역은 중앙정부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며, 지역적 독자성을 지니게 되었다. 고려말 섬진 및 영산강 유역은 왜구 침입이 잦았으며, 조운의 통행로가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으로 올라가게 됨에 따라 동해안보다 왜구의 약탈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되었다. 당시 곡창지대였던 이 지역은 남해안이나 서해를 통해 침입하는 왜구에 의하여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의 주요 곡창지대로서의 역활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국가의 남방 방어선으로 전략적 중요도가 높았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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