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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충만 Dec 07. 2018

변화의 시작을 찾아서

2014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한 연구로부터 우리 사회 놀이판의 변화에 대해 정리하는 원고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뭐라고 놀이판을 정리할 수 있겠나 싶어 처음에는 고사했다. 하지만 담당 연구원은 더도 말고 내가 알고 있는 수준까지만 써달라며 재차 부탁했다. 나도 놀 권리 이야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어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 싶어 펜을 들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놀 권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에 비해 지금은 사회적 관심과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경쟁이 치열하고 교육열이 강한 대한민국에서 놀 권리는 어렵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내가 일했던 아동 NGO에서도 놀 권리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게 물 들어오는 느낌이구나 싶다. 놀이를 자신의 키워드로 삼아 일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놀이를 중심으로 교육, 예술, 문화로 키워드를 넓히는 움직임도 있다. 변화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변화를 느끼고 있는 걸까? 담당자의 빼어난 촉일까? 아니면 연일 놀이를 주제로 한 행사가 많아졌기 때문에? 강연 요청이 늘어서? 뭔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놀이에 관한 논의가 늘어나고 있다는데... 흐음... 그걸 어떻게 알지?


엄밀하게 사실 관계를 따져 볼 수 있는 지표나 연구는 없다. 하지만 경향이나 추세 정도는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언론의 관심도이다. 현시점에서 언론의 기능이 사회의 모든 차원의 논의를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어젠다를 정하거나 다양한 영역의 논의를 받아내는 기능은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뉴스 검색을 활용해 놀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을 알아보기로 했다. 1년 단위로 놀이 관련한 키워드를 검색해 기사의 개수를 파악하는 단순한 방식이다. 그냥 '놀이'로 키워드 검색을 해서는 연예인들의 셀카놀이부터 놀이공원 데이트까지 온갖 것들이 걸린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상세검색이다. 놀이를 키워드로 해서 잡힌 기사들 중 '아동', '어린이'를 모두 포함하는 기사를 찾는 식이다. 


또한 놀이판 논의가 놀이 자체와 놀이터로 나눠지기 때문에 이를 모두 담아보려 했다. 아동의 '놀 권리'도 빠트릴 수 없다. '놀 권리'는 놀이를 사회적 개입이 필요한 영역으로 보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포함하였다. 결과적으로 '놀이+아동+어린이' 조합, '놀이+놀이터' 조합, 그리고 '놀 권리' 조합을 담은 뉴스 기사의 개수를 언론의 관심도로 정의해봤다. 물론 기사 내용을 꼼꼼히 읽으며 확인하기는 어려워 허수도 분명 포함된다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2012년을 조사 첫 시점으로 임의로 잡았는데 이때부터 놀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줄곧 증대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만 놓고 보면 300% 이상 증가했다. 올해도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는데 11월 말까지의 빈도가 연말까지 지속된다고 가정한 수치를 대입하면 그 폭은 더 커져 440% 관심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상승하는 폭도 30% 이상으로 꾸준하다. 기울기가 가장 가파른 2014-2015년의 경우 전 해에 비해 70%나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놀 권리'만 따로 떼서 보면 더 드라마틱하다. 사실 2014년까지는 '놀 권리'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나 사회적 논의는 미미했다. 하지만 2015년부터 놀이가 하나의 '권리'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하고, 공론화가 시작되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로 보면 4,300%가량 폭발적으로 관심도가 증대했고, 2015년부터만 봐도 올해까지 170%가량 상승한 결과다.



방송사의 관심도 점차 늘고 있다. 얼마 전 KBS와 MBC에서 놀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연달아 방영했다. EBS도 내년 초 다큐 방영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스브스도 각성하라!) 지상파가 과거처럼 사회 논의를 주도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놀이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연달아 냈다는 점은 우리 사회의 어떤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한 결과는 아닐까?


마지막으로 정치권의 관심도 커졌다. 이를 가장 잘 확인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선거다. 정치인의 촉이 가장 예민해지는 시기인데 2014년에 있었던 지방선거 때는 후보들의 아동 놀이나 놀 권리에 대한 관심은 아까와 비슷한 방식으로 확인해봤을 때 12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 지방선거에서는 167건을 넘었다. 2010년 지방선거 때는 3건이었으니 변화를 짐작해볼 수 있다. 


독일의 언어학자 빌헬름 훔볼트는 "언어는 사고를 형성하는 기관이다. 지적 활동과 언어는 하나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라고 말해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구성원의 인식이자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언어의 사용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놀이에 관한 지적 활동이 활발해지고 아이들의 세계에 관한 관심이 늘어났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티핑포인트란 어떠한 현상이 서서히 진행되다가 특정 요인으로 한순간 폭발하는 것을 말함


위 데이터의 추이를 살펴보면 2014년이 우리 사회에서 놀이에 관한 논의가 크게 확산되는 티핑포인트 해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서서히 쌓여 오던 사회적 흐름이 2014년 어떤 요인에 의해 촉발되어 2015년 이후에도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그 요인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2014년 초에 경향신문에서 진행한 <놀이가 밥이다> 기획연재가 떠올랐다.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의 방문과 강연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 다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페북 타임라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페북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생각이나 관련 기사, 활동 내용은 틈틈이 담아 두다 보니 힌트가 있을까 싶어 찾기 시작했다. 타임라인을 올라가는데 문득 2014년 4월 한 달이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출처: 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 홈페이지


세월호 참사였다. 그 시절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부끄럽고 이기적인 소시민이었다. 울분과 답답함이 가득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아는 분들은 길거리로 나가 서명도 받고 노란 리본도 매달았지만 난 용기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흘러 무기력이 미안함으로 바뀌어갈 무렵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앞에 놓인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내 주된 관심사가 마침 놀 권리였고, 가만히 있으라는 이 사회에 가만히 있지 않을 수 있는 어떤 힘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 '놀이'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미안한 마음을 덜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놀이판에서 오랜 세월 아이들과 함께 놀이 활동을 해온 개인과 단체들도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4년 놀이에 관한 여러 행사에서 만난 놀이터 활동가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세월호 이야기를 하며 울먹이거나 분노했다. 왜 이 사건이 발생했는지, 왜 우리는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는지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고민의 시간이 이후 놀이 활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2014년 한 학원에서 내보낸 광고, 쇠사슬로 아이를 묶어서 공부시키겠다는 우리 사회의 단면


또한 세월호 참사는 학부모들에게도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간 우리 사회는 극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총력전을 벌이는 가운데 아이들까지도 학업 경쟁에 내몰렸다. 하지만 많은 학부모가 세월호와 같은 사건은 우리 아이에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게 하고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게 했을 텐데.. 그저 살아만 있었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을 마음껏 자기 자신으로 살렴."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연극을 본 한 블로거의 후기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놀이판에서 만난 학부모들에게서 여러 차례 들었다. 자신의 아이는 놀이를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며 살아 있는 순간만큼은 마음껏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한 학부모의 울먹이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요즘에도 놀 권리 강연에 가면 곳곳에서 노란 리본을 본다. 


놀 권리 확산의 티핑포인트는 세월호 참사였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이 사회에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사회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 답은 ‘놀이’였다. 한두 사람의 선구적인 공로나 크고 작은 단체들의 헌신도 놀 권리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도도하고 나직이 흐르는 두터운 변화 앞에 우리는 그저 빚진 사람들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놀이판에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있나 보다 오해할 수도 있겠다. 아쉽게도 논의의 확산만큼 실질적으로 아이들의 삶이 변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간 정책이나 예산,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반짝 부풀었다가 거품처럼 사라져 간 운동이 얼마나 많았던가. 물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다음 사람을 위한 족적이 될 순 있다. 하지만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해야 하는 최대 시간을 법으로 정해주세요. 시간을 멈추는 기계가 있어야 놀 수 있어요."라고 말했던 한 아이의 절박함에 우리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변화의 길은 멀겠지만 분명 다다를 수 있다. 아이들의 놀 권리 회복을 위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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