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늘직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작가 May 27. 2024

컴백 코리아. 내 집 그리고 회사.

살아온 32년, 살아갈 32년 [14]

나는 2003년 3월부터 2009년 6월까지 만 6년 3개월의 주재원 생활을 했었다. 주재원 시절은 나의 인생, 직당 생활의 전성기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내 인생 최악의 시기이기도 했다. 주재원 생활 동안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특히 마지막 해였던 2009년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고, 겪고 싶지도 않은 인생 한 번의 끔찍한 시기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전 세계 네트워크들의 비즈니스 상황이 좋지 않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사무소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마하게 험악한 상황이었는데, 회사 내부 일이라서 자세히 적지는 못하는 것을 양해 부탁드린다.


나는 2009년 6월 본사 귀임 발령이 났는데, 군대 말년처럼 주재원 말년의 경우도 귀임 발령 후 몇 개월  동안은 가족 귀국 챙기고, 해당 국가 여행도 자주 하면서 해피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행 비행기 타는 마지막 날까지 일을 했었다. 그것도 보통 일 많이 한 수준이 아니라 뼈를 갈아 넣은 수준으로 일을 했다. 


나는 일하면서 "갈아 넣는다."는 말을 아주 아주 싫어한다. 갈아넣는다는 것은 일을 즐기는 것이 아니고 싫어도 한다는 의미이다. 나를 갈아 넣으면 정신과 육체가 망하는 지름길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나를 갈아넣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


2009년 그 사건 이후 나는 절대, 네버 일하면서 나를 갈아넣지 않았다. 설령 회사가 원하더라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원이  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너무나 잘한 결정이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글로 남길 수는 없지만, 이때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공황장애’까지 얻는 최악의 상황까지 갔었다. 내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말이 제어도 되지 않고, 헛소리와 헛것까지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ㅋㅋㅋ 다행히 병을 초기에 발견해서 조치를 잘하고 가족들과 회사에서 적극 도와주어, 회복이 잘되어서 무사히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출처 : AP/뉴시스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귀국한 날이 2009년 6월 6일 현충일이었는데, 인천공항에 이른 아침에 내려서 숨 쉰 조국의 공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그리고 맹세했다. "앞으로 다시는 주재원 나가지 않는다.!"



늘작가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인생 내공이 깊고 강한 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기 때문이다라고 자뻑한다. 흙수저 출신인데 금수저 되었다가 다시 무수저로, 죽음 문턱까지 2번, 공황장애까지, 자녀 사춘기 때 자녀 문제도 또 한 번 인생 바닥까지, 회사 부장 팀원까지 등등. 와 진쫘 많네.






한국에 돌아와서 주재원 기간 종안 모았던 돈으로 전세금 내주고 드디어 꿈에도 그렸던 내 집에 입주를 하게 되었다. 강남 25평에 썩다리 아파트였지만 올 수리를 하여 이사한 후 첫 출근 한 날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버스를 타고 창 밖으로 펼쳐지는 양재천과 강남의 풍경을 보면서...


1997년 양재천 변 18평 빌라에서 신혼을 시작했지만 1년 만에 쫄딱 망해서 양재천 변 반지하 단칸방으로 내려갔었다. 그 이후 이 동네를 떠나 서울에서 제일 싼 동네를 전전하다 이역만리 인도네시아에 돈 벌러 갔었다. 그리고 11년 만에 이렇게 다시 재기하여 강남 내 집에서 출근하게 된 것이 정말 꿈인 듯하였다.


그날 출근길 버스 안에서 장인/장모님께 핸드폰 문자를 보냈었다. "금쪽같은 첫 째 딸을 저에게 주었는데, 1998년 망해서 전 재산 다 말아먹고 따님 고생 말도 없이 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믿고 격려하고 도와주시어 진심  감사합니다. 그동안의 고생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습니다. 오늘 10여 년 전에 등기 친 집에서 드디어 첫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열씨미 잘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이렇게 문자를 보내면서 지난 인생이 오버랩되고 펑펑 눈물을 흘렸었다. 집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나는 인생이고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한 약속을 지금까지 지켜가고 있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지킬 것이다. (참고로, 주재원 기간 동안 장인/장모님 일 년에 1~2번 한 달 동안-인니 비자는 한 달- 인도네시아 초대해서 살게 해 드렸다. 함께 골프 치면서^^)


나의 새로운 꿈은 이 아파트 신축되면 장인/장모님 초대해서 아파트 커뮤니티에서 조식 먹고, 사우나에 수영하고, 골프 연습장에서 골프도 치고, 스카이라운지에서 커피 한잔 등등을 수없이 하는 것이다. 그 꿈 이루어지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


2009년 양재천변 지도 (출처 : 카카오맵)


추억 돋는다. 카카오맵에서 스샷 한 2009년 양재천변 지도이다. 개포 1 2 3 4 5 6 7 8 9단지 모두 재건축되기 이전이다. 이때 양재천변 아파트 34평 8~9억이면 살 수 있었다. ㅋ



그런데 함정은 우리 아이들은 “아빠, 엄마 우리 집 망했어요? 집이 왜 이렇게 작아요?” ㅋㅋㅋ  주재원 시절 60평 아파트에 살았는데, 방 2칸에 화장실 하나에 사니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첫째 아들 초등 5학년, 둘째 딸내미 초딩 1학년 네 가족이었지만 다 살 수 있더라.


늘작가는 후배들에게 지금도 이렇게 조언을 한다. 신도시 신축 아파트 살지 말고, 강남에서 몸빵/몸테크하면 사다리 올라올 수 있다고. 베스트는 신축 실거주이지만, 돈이 없으면 차선 아니 차차선이라도 신축이나 준신축 전세 끼고 사놓고, 근처 썩다리 아파트나 빌라에서 전세 아니면 반전세 이것도 돈이 없으면 월세 살면서 돈 모으라고.



인류가 탄생한 이래 내 돈 모으는 속도보다 물가/인플레이션이 항상 더 빠르다능.  


인플레이션(출처 : 모름)


그래서 우리는 인플레이션 헤지를 위해 반드시 자산을 가져야 한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금이든, 비트코인이든. 대출을 잘 활용하는 것도 아주 좋은 인플레이션 헤지 방법이다. 단, 그 시기와 방법을 잘해야 한다. 거꾸로 질렀다가는 심하게 고생할 수 있다. 지난 20~21년 부동산과 주식, 코인 꼭지를 잡았던 경우처럼. 그리고 모든 대출은 본인이 감당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해야 하고.



이렇게 꿈에도 그렸던 내 집에 살게 되었지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고 더 이상 부동산이나 재테크 공부를 하고 투자할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주재 나갈 때 사두었던 아파트가 있었는데, 노무현 정부 때 다주택자 규제한다는 말에 쫄아서 팔고 난 후 2006년 용인 대형을 잡았는데, 이 아파트에 물려서 잃어버린 10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부동산 투자 하지 않는다고 다짐을 했었다. 이 이야기는 블로그에서 한 번 한 적이 있어서 생략한다.






한편 돌아온 한국 본사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후진국에서 근무하는 주재원들의 좋지 않은 점 중의 하나는 한국이 선진국이라 후진국에서 일을 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나의 실력이 뒤쳐진다는 것이다. 특히 2010년대는 한국 사회가 급격하게 디지털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라서 더 그랬다.


해외사무소장/지점장은 회사에서 팀장급이다. 본사에 귀임하면 팀장을 달아야 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귀임 시기가 2009년이라 2008년 금융위기로 회사가 어렵고 인력 구조조정까지 말이 나오는 때여서 자리가 없었다. 또한 그동안 나를 끌어주었던 회사 힘 있는 분들이(임원급) 많이 퇴사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이렇게 6년이라는 세월은 나에게 회사, 특히 본사에서 큰 핸디캡을 주고 있었다. 컴백 코리아는 했지만 만만치 않은 본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15편에서 계속...


제주도 (24.3.25. 08:06)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직딩 전성시대 해외주재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