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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작가 May 07. 2024

나의 직딩 전성시대 해외주재원

살아온 32년, 살아갈 32년 [12]

2003년 2월 중순 정식 주재원 발령이 나기 이전에 싱가포르 RHQ(Regional headquarter)을 거쳐 인도네시아 출장을 갔었다. 지금도 그날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거 많이 창피하지만, 그때까지 해외에 나가 본 것은 내 인생에서 딱  번 뿐이었다. 처음은 신입사원 해외 연수 때 그리고 신혼여행 그리고 그날.


출장은 회사 고위 임원과 함께 갔었는데, 내가 그 말이 하니 "아니, 우리 회사에서 해외 출장 갈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까지 못 가 보았다고? 앞으로 해외 원 없이 살 게 해 줄게" 하고 호탕하게 웃으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분과는 현재 만남이 끊어졌는데, 어떻게 사시는지...


그때 나의 나이 만 38세이고 세상 무서울 것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 해외 경험 하나 없었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뭐, 태어나면서부터 주재원인 사람 있나? 하면 되겠지. 악으로 깡으로 하자."  


늘~인생노트

나의 인생 슬로건 중 하나가 '까짓것'이다. (이 단어는 브런치스토리 작가 활동 중 생각났었다. 늘작가 매거진 중 하나가 까짓것이기도 하다. 이 매거진의 글 모아서 나중에 종이책도 낼 것이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늘~ 이런 마음가짐을 하고 행동을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난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은 이런 마인드였기 때문이다. 엄청난 성공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한 것도 대단하다고 자뻑을 한다. :)




싱가포르에 도착하니 말로만 듣던 창이공항 규모와 싱가포르 모습에 눈이 픽픽 돌아갔었다. 태어나서 처음 아니고 두 번째 와보는 열대 지방^^, 공항에서 시내 들어가는 길 좌우의 열대나무와 꽃, 도로가 너무 깨끗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시내에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함께 있는 나라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2003년 2월. 싱가포르 호텔에서 본 뷰


외장하드 뒤져서 2003년 2월 출장 때 찍은 사진 찾았다. 그때 호텔 창가에서 보인 이 풍경을 보면서  "늘작가 출세했네. 대한민국 남도 깡촌 전깃불로 없는 부락에서 자란 내가 해외에서 일하게 되다니. 까짓것! 해 보자"



싱가포르에서 3박 정도 지내고 인도네시아에서 2박인가 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갔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주재원 발령을 위한 주변 정리와 교육을 받은 후 3월 말 다시 자카르타로 갔다. 나는 당시 차장 2년 차(입사 10년 차)였었는데, 도네시아 초대 사무소장으로 부임을 하게 되었다.



그해 8월 초 가족들이 자카르타로 오기 이전에는 자카르타 특급 호텔에서 생활을 했었다. 그때 신박한 생각을 한 것이 자카르타 유명 특급호텔을 다 자보는 것이었다. 외장하드를 보니 묵었던 호텔마다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있다. 그중에서 이 사진 하나를 골랐다.


2003.4.2 ~ 4.5 어느 날


와, 사진 있었네. 추억 돋는다. 이 사진은 자카르타 하얏트 호텔에서 숙박할 때 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곳이 자카르타 구도심 최고 번화가인 Bundaran HI라는 곳이다. 가운데 보이는 하얀 건물이 동남아에 많이 있는 별 다섯 개 만다린리엔탈 호텔이다. 이곳이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구글 어스 나와랏 !


출처 : 구글어스 (자카르티)


11편에서 이야기했었지만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섬나라이고, 서쪽 반다아체에서 동쪽 자아푸라까지 비행기로 쉬지 않고 가면(직항 없고 수도 자카르타에서 갈아타야 갈 수 있다)  6시간 30분 걸린다. 미국 동서보다 크다. 서울에서 자카르타까지 직항 시간이 6시간 30분 걸리는 거리이다. ㅎ


출처 ㅣ 구글어스 (그랜드햐얏트호텔, 자카르타)


와 대박. 구글 어스에서 그랜드하얏트호텔 자카르타 부근 찾아봤는데 천지개벽했다.



위 사진 가운데 불 켜진 건물이 그랜드하얏트호텔 자카르타이고, 왼쪽 큰 건물이 아래 사진 오른쪽 낮은 초록색 건물(구. 인도네시아호텔)을 허물고 재건축한 것이다.


2003.4.2 ~ 4.5 어느 날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위 사진 속 멀리 고층 빌딩이 있는 곳이 잘란(길) 수드르만이라고 자카르타 최고 상업 지역이다. 늘작가 자카르타 사무소도 저곳에 있었다.  20년 전 사진이니 지금은 훨씬 더 높고 많은 고층 빌딩들이 즐비할 것이다.



하얏트호텔 부근 구글 지도에서 가져왔다.


출처 : 구글 지도


아 추억 돋는다.  내년에 정년 퇴직하면 실업급여 모아서 후내년에 아시아나 혹은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자카르타 가서 인도네이사 한 달 살기 하리라. :)


여기까지는 어제(5/6) 저녁 지름신이 강림하여 원래 적어 놓았던 글 무시하고 새로 적은 부문이다.



해외주재원 시절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책 몇 권 분량이라 먼 훗날 기회가 되면 자세히 적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아주 아주 줄여서 이야기한다.






늘작가가 해외주재원 생활을 했던 시기는 2003년 3월부터 2009년 6월까지 만 6년 3개월이었다. 나이는 만 38세부터 44세까지였는데, 이 기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하고, 돈 모으고, 보람차고 알찬 시간을 보냈다.


현지인 단 한 명도 없었던 이역만리 타국에 가서, 회사를 만들고 키웠다. 해외 사무소장/지점장/법인장은 본사 팀장급이고, 그 나라에서 회사를 대표하는 사장이다. 이 시절 배운 경험과 노하우는 그 이후 나의 직장과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항상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중간에 어려운 일들이 생겨서 자의로 또 타의로 중도 귀임도 할 뻔했지만, 위기를 잘 넘기고 주재원 생활을 예정보다 더 오래 하고 무사히 본사로 돌아왔다.



해외 주재원


출처 : 모름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해외주재원을 꿈꾸는 분들이 있을 텐데, 주재원을 하는 이점 중의 하나는 자녀교육과 육아이다. 후진국 이점 중의 하나가 육아인데, 아내에게 두 아이를(첫째 5살, 둘째 1살 때 주재 나감) 식모와 유모를 데리고 키우는 선물도 해주게 되었다. (단, 지금은 인도네시아도 수준이 높아져서 이런 생활은 힘들다)


우리 두 아이는 국제학교를 다니게 되어 Native English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고1을 끼고 해외 주재원 3년을 하면 국내 대학에 특례 입학이 가능한데, 아무리 공부 못해도 서성한 정도까지는 대부분 들어갈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 귀국을 해서 그 혜택은 받지는 못했다.



주재원 나가는 이점 중의 또 하나는 집을 업그레이드하거나 한 채 더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집을 한 채 더 샀었다. (한강 뷰 보이는 신대방동 34평 RR 아파트) 하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에서 다주택자에게 세금 어마하게 때린다고 하여 쫄아서 1억 정도 이익을 보고 팔았는데, 지금도 그것이 너무 아쉽다.


그 이후 아파트 판 돈 들고 있다가 용인 대형을 처제와 공동투자하여 2006년에 매수하였는데, 물려서 잃어버린 10년을 보내기도 하였다. 블로그에 이 이야기 적었는데, 2006년에 6억에 매수하여 2016년에 5억에 -1억 손해 보고 탈출했었다.


그래도 나의 부동산 투자 결과를 복기해 보면 베스트니었지만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만들었다.



주재원 이점 중 가장 큰 장점은 돈을 많이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재원은 아파트와 차량(후진국은 운전기사까지 제공)이 제공되고 주재 수당까지 따로 나오므로 마음만 먹으면 본사 급여 다 모을 수 있다. 내가 주재원 나간 가장 중요한 목적이 이것이었는데, 주재 생활을 하면서 아끼고 돈을 모아서 그 많던 빚도 모두 갚았다.


해외 주재원의 꿈을 가진 후배님들 기회가 온다면 꼭 가시길 조언드린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후진국 말고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으로 가시길. 후진국도 나쁘진 않지만 선진국이 당근 모든 면에서 더 좋다.




주재원 선배 조언


주재 나가면서 당시 상사가 나에게 조언해 준 것이 “주재원 시간은 인생에서 제일 활동적이고 귀중한 시기이니 일 외 꼭 하나 뭔가는 원없이 해보고 들어가라"라고 하였다. 골프든, 어학이든, 비즈니스 거리든…”



가족여행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아내와 상의하여 “가족여행”으로 정했다. 단, 멀리 가지는 말고 지금 살고 있는 나라가 해외이니 인도네시아 국내와 인근 동남아시아 위주로 다니기로 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구석구석과 인근 동남아 국가 가족여행을 정말 원 없이 했었다.


좌 (2004. 인도네시아 족자카트타 힌두교 사원) 우(2005. 인도네시아 발리)


왼쪽 사진은 장모님이 한국에 두고 온 둘째를 데리고 인도네시아 왔을 때 여행 갔던 사진이다. 인도네시아 발령받았을 때 둘째가 100일이라 너무 어려 비행기 탈 수 없어서 처갓집에서 일 년 키워주신 후 데리고 왔었다. 이 둘째가 지금 대학 3학년이다. 가운데 작은 아이가 여조카인데, 이번에 인서울 미대 졸업했다.^^


좌(2006년 말레지아 KL) 우(2009. 마지막 여행. 인도네시아 머나도)


위 사진 왼쪽 말레지아는 주재원 가족과 함께 갔었는데, 에어아시아 이용했었다. (이 가족과 지금도 만난다)  해외여행 다닐 때, 비싼 주재국 국적기보다는 저가 비행기를 이용하고 가성비 좋은 숙소를 잡아서 알뜰하게 여행을 했었다. 오른쪽 사진은 2009년 마지막 여행 때 인도네시아 로칼항공(인니는 로칼항공이 10개 회사 이상 있다) 중에서도 저렴이인 스리위자야 항공 앞에서 찍은 것이다.



이렇게 원 없이 여행한 경험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과 경험이 되었다. 늘작가 가족들이 지금 서로 잘 지내는 이유가 이때 많은 여행을 하면서 서로 함께 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이 된 우리 아이들 지금도 부모와 함께 여행 가자고 하면 주저 않고 가자고 한다능 :)



골프


골프. 지금은 골프 치지 않지만 주재원 시절 골프도 원 없이 쳤다. 회사 업무 상으로도 자주 쳤지만 아내와 함께 주말에 자주 필드에 나갔었다. 귀임할 무렵 싱글까지 했었다.


좌 (발리 니르와나 골프장) 우(자카르타 구눙굴리스 골프장)



좋은 인연


그리고 주재원 하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특히 아이들 친구 부모님(다른 회사 한국 주재원 분들)과 친했었는데, 그분들과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20년 지기 친구가 되었다. 세 가족 그룹, 네 가족 그룹 이렇게 있다.






이렇게 나의 화려한 리즈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 와서 복기를 해 보면 ‘부동산과 재테크’는 잘 알지 못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만약 조금만 그쪽으로 눈을 떴더라면 신대방동 집을 팔지 않았을 테고, 더 나가서 싱가포르에 집 한 채 마련했을 것이다. 당시 인도네시아 한국인 교민 사회에서 싱가포르에 등기 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외국인들에게 집값의 80% 이상 저금리 장기 대출을 해주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외국인이 싱가포르에 집 사면 취득세 어마하게 내어야 한다) 그래서 내 돈 거의 없어도 싱가포르 아파트 살 수 있었다.


주재원의 경우 주재국 집은 사면 안되지만 다른 나라 집을 사는 것은 괜찮다. 당시 회사 동남아 주재원들 끼리 농담 삼아 “우리 싱가포르에 콘도 하나 살까?” 했었는데, 그때 실행을 옮겼더라면 지금 금수저 되었을텐데 … 아까비. 당시 회사 동남아 주재원들 중 단 한 명도 싱가포르에 아파트 산 사람 없었다. 쯧쯧 ㅎ



일과 회사


주재 생활 3년 차 무렵에 본사 고위 임원이 출장을 와서 나에게 해 준 말이 내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분의 조언으로 나는 객관적으로(?) 임원이 되기 힘드니, 길게 오래가자는 결정을 했다. 이 이야기는 브런치스토리에서 예전에 자세히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에 생략한다.



이렇게 회사, 일, 가족, 인생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경험을 주재원 기간 동안에 했었다. 당시 일하고 생활하는 것이 녹녹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주재원 6년 시절이 내 삶에서 최 전성기였다. 체력과 정신력 모든 면에서...


2009년 귀임 전 인도네시아 전통복장 가족사진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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