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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소 Dec 23. 2020

퇴근시간에 퇴근한 죄를 지어버렸다.

억울해도 직장인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퇴근하고 싶은 게 죄라면 저는 무기징역입니다

퇴근하고 싶은 게 죄라면 저는 무기징역입니다



직장인 허언증 중 하나가 바로 ‘회사 때려 치고 유튜브 시작한다’이다. 지금 당장 영상 하나를 올려서 조회수가 빵빵 터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은 허황된 꿈이라는 걸 실감하는데 그리 오래걸리지 않는다. 터덜터덜 사무실로 다시 발길을 옮긴다.      


하지만 단 하나의 영상으로 700만 조회수를 기록한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방탄소년단의 노래에 맞춰 학교 강당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춘 고교생 김정현 양이다. 





아득한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 패션의 소녀는, 당장 음악방송무대에 올라가도 될 만큼 화려하고 역동적인 춤을 선보였다. 소녀의 열정적 춤사위에 몰려들어 웃으며 환호하는 학생들. 반응도 뜨거웠다.



4년이 지났다. 얼마 전 유재석, 조세호가 진행하는 유퀴즈온더블럭에 그녀가 출연했다. 벌써 대학교 2학년이 된 그녀는 영상 속 끼 많던 모습만큼 입담도 재치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에 주눅이 들 법도 한데 당당하고 야무지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재석이 정현 양에게 물었다.



"본인이 바라는 30대의 모습은?"



기다렸다는 듯 “제가 꿈꾸는 모습이 있어요! 커리어우먼!”이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냉큼 일어서서 직접 시연해주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법부터 숄더백을 메고 약간의 시크함을 담아 바쁘게 걷는 모양새까지 꽤나 구체적인 모습이다. 걷는 내내 손목시계로 시간을 체크하고, 말을 거는 유재석에게 손바닥을 펼치며 바쁘다는 신호를 보낸다. 상황극 내내 바쁘던 그녀는 손전화를 만들며 “일이 너무 많아”라고 애드립을 넣는다. 주말드라마의 여주인공을 그대로 복사한 모습에 MC들은 물론 나까지도 깔깔 웃었다. 하지만 웃음 끝에 현타가 왔다. 


“막상 회사 다녀 봐라.”


나 역시 학생 때는 직장인의 생활을 동경했다. 취업준비생 시절에는 말 할 것도 없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삼삼오오 점심시간에 맞춰 나오는 얼굴에 언제나 나를 대입해보곤 했다. 나를 받아줄 회사가 있을까? 받아주기만 하면 야근도 즐겁게 할 텐데. 아닌 게 아니라 야근하는 것조차 소원이었다.



멋진 직장생활의 꿈을 품고 어느덧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만사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알람이 울리면 ‘반차를 쓸까’, ‘아프다고 할까’, ‘출근 시간이 10시면 좋은데’ 하는 헛된 희망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집을 나서며 SNS에 글을 남긴다. ‘퇴근하고 싶다’ 직장인 7년차, 출근도 안했는데 퇴근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가뜩이가 가기 싫은 회사에 정이 더 떨어진 사건이 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흉을 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얘기가 내 귀에 들어오는 건 꽤나 씁쓸한 일이다. 지난 2년 정도 몸 담았던 부서의 후배가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전한 말이다.     


“팀장님 진짜 어이없어요. 저번에 뭐라는 줄 아세요?”


“뭐라고 하셨길래?”


“이소는 맨날 집에만 가려고 했는데, 후임인 유리는 야근을 잘 해서 좋네.”


“헐......”     


누구나 하는, 아니 해야만 하는 퇴근이다. 제 시간에 내일 다 하고 야근을 밥먹 듯이 안 했다는 이유로 비교대상이 되었다. 칼퇴나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당시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를 맡아 칼퇴는커녕 주말에도 12시간 넘게 사무실에 앉아 있었던 고통의 시간을 생각하면 꽤나 섭섭한 말이었다.


매일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다. 피곤한 기운에 퇴근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진심이었다. 밥도 못 먹는 나를 안쓰럽게 여긴 옆 팀 직원이 가져다주는 소보로빵조차 먹을 힘이 없었던 적도 있으니까. 불필요한 야근을 안 했다는 이유로 뒷담화라는 벌을 받았다. 팀장은 일을 하든 안하든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옛날 사람이다.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묘한 억울함이 남았다.




한 취업포탈 사이트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정시퇴근 현황>을 설문조사한 결과 직장인 51.5%가 정시퇴근을 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상사나 선배, 동료 눈치가 보여서라고 했다. 동병상련 직장인들 처지를 위로 삼아야 하는 걸까?


직장인은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치를 봐야한다. 초과근무 100시간을 넘겨도 나중에는 ‘집에만 가고 싶어 했던 직원’이 되는 부조리함도 버텨내야 하는 존재다. ‘취직만 시켜주면 야근도 즐겁게 할 텐데’는 ‘퇴사 하고 싶다’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유튜브 속 격정적으로 방탄소년단의 춤을 추던 소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빡빡한 업무를 소화해내는 커리어우먼을 멋진 미래로 그리고 있지만 막상 그 처지에 놓이면 밥도 못 먹는다며 SNS에 글을 올릴 지도 모르겠다. 직장인들이 700만 유튜버의 꿈을 꾼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노래가 나오면 춤을 추고, 즐거울 때 환호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그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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