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생에도 모르는걸 19세에는 알았을까?

42년 된 진화하는 인간

by 네네

누군가 그랬다. 소비자로만 살지 말고, 생산자로 살아보라고. 전업주부인 나에게 생산자란 어떤걸까?

생산자로 살아보려 글을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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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EBS의 호모이코노미쿠스(6개월에 천만원만들기) 에 출연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얼마나 나태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몰랐다. 두아이를 키우는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할일을. 하고 있으며 미래의 막연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그냥 이대로 사는게 나의 행복의 전부인줄 알았다.남편이 벌어다 주는 급여는 속된 말로. 저축 쬐금하면서 그저 4인가족이 살아갈 금액인데 딱히 결핍이 없기에 발전도 못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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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에 가장 필요한 순간에 없었던것이 결핍이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가? 결코 자랑을 하는게 아니라 그 결핍이 없었기에 나의 인생은 40년동안. 결혼전에는 아빠의 경제력에 기대어. 결혼후에는 남편의 경제력에 기대어 사는 주체적이지 않은 삶이었다. 40년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했던 내가 요즘 내가 잘하는것 좋아하는것에 대해 혼자 생각하니 답을 얻기 어려워 글을 써보기로 했다.


1남 2녀의 장녀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당신이 못배우신 한 때문에 아이들에게 모든걸 해주시고. 싶어하셨다. 1998년 IMF가 터지기 전까지는 .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공부머리가 없었는지. 나의 성적은 시원치 않았다. 개포동에 살았던터라 자칭 8학군에서 중고등 학창시절을 보내며 새벽녁에 대치동 1타강사의 학원강사 수강등록을 위해서 줄서던.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래서 나는 내아이의 사교육에 회의적인지도 모르겠다. 될놈은 알아서 될거라고. 아이를 망치는 가장 빠른 방법이 해달라는걸 다해주는 거라는 말이 딱 나에게 해당될런지 모르겠다.


나에게 학력 컴플렉스가 생긴건 내가 전문대를 간 후였다.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호텔리어’를 보고 막연히 관광호텔 학과를 찾아 전문대를 진학한건 내 인생의 첫번째 실수즘 될것이다. 학교 타이틀보다는 학과 좋은곳을 가는게 취업이 잘 될거라는 생각은 너무 앞서가던 생각일까. 너무 순진했던 생각일까. 그 와중에. 고등학교 베프들은 (4명) 다들 인서울 대학을 가니 피참한. 기분에 빠졌다. 대학교 1학년 학교에 가서 나는 전문대의 학사. 커리쿨럼은 고등학교 때처럼 수업시간이. 짜여져 나오는데 4년제는 자기가 짜기 나름이라는데 충격을 받았다. 고등학교 베프중 한명은 여대를 다녀서 미팅을 많이 하며 우리에게도 같이가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쁘장한 장나라를 닮은 그녀는 꽤 인기가 있었고 친구들과. 있으면 움츠러드는 내자신이. 싫었다.


그럼에도 나는 별다른 삶의 변화를 꾀하지. 않았다. 다를 사람들과. 같은곳을 보며 같은 생각으로 달리고 생각하니. 별로 뛰어나지. 않았던 내가. 경쟁력이. 있을리. 없었다. 나의. 20대의 찬란한 추억은 별로. 없다. 대학입시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던. 삶을. 남들이. 인정하는 궤도에 올리고자. 남에게 인정받는 직업 그것을 따내는게 나의 20대를 온통 사로잡아. 항상 우울하고.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았다. 더 좋은 타이튼의 직장 그것이 무어라고. 그렇다고 그렇게 성공스럭 직장을 다닌것도 아니다. 97학번인. 나는. 98년의 IMF로. 졸업당시 갈만한 직장이. 없었다. 관광호텔학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삼성동에 있는 코엑스 인터건티넨탈에 입사를 했다. 영어실력이 부족했던 나는. 프론트로 가지 못하고 식음료부에. 배치를 받았다. 삼성동에서 집이 가까웠기에 저녁에. 여는 멤버쉽 바가 나의 첫직장이 되었다. 이유는 택시비가. 가장 덕게. 나온다는. 이유로 술도 못하는 내가 바에서 일을 했으니 일이 재미있을리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