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1]

일렁일렁 뱅글뱅글


[1]

우리의 만남은 인위적이었다. 자만추, 인만추. 그런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인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아.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결론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지.

연애 프로그램들 있잖아요. 그런 거 보면 솔직히 이해가 안 됐어요. 연애 못 하고 결혼 못 하는 남자, 여자들을 한 곳에 불러다가 일주일같이 머무르게 만들면 다들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진 사람들처럼 첫눈에 반했다는 둥, 하루 만에 사랑에 빠졌다는 둥 그런 오줄없는 얘기들을 해대고 고작 하루 이틀 본 여자와 행복해하고 고백하고 거절이라도 당하면 좌절하며 울고불고, 웃기는 모습들을 보이잖아요. 에휴 지랄들을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xx이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이틀이었어요. 그래서 xx이와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나는 솔로처럼 사랑하게 된 것 같다며, 그런 얘기를 하면서 한바탕 웃었죠.


[2]

오늘 너희 집에 다녀왔어. 네가 없는 걸 아는데도 다녀왔어. 익숙하게 네가 알려준 너희 집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도어록이 열리지 않았던 날. 내가 실수로 다른 숫자를 누른 줄 알았어. 근데 같은 번호를 다섯 번을 눌렀는데 열리지 않아서 도어록이 완전히 잠겨버렸어. 얼마나 걱정됐는 줄 알아?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이 있잖아. 그때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 전화도 받지 않고 도어록을 몇 번에 걸쳐 누르고 초인종을 눌러도 집안에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미칠 뻔했어.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결국 열쇠집 사람을 불러 너의 집 문을 열었어. 집주인이 맞냐고 물어보는 아저씨 말에 거짓말을 했어.

[3]

수줍은 듯 웃고 옛 추억을 떠올리며 설레하고 아련한 얼굴을 보이며. 누구의 말이 맞냐며 억울해하고 자신의 말이 맞다는 인정을 받은 거처럼 “그렇죠. 제가 맞죠?” 하며 약을 올리 듯 웃기도 하며. 그녀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속상해하고 분노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본인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괴로워하고 후회하고 눈물까지 흘렸다. 얼마나 오래 앉아 떠들었는지 목과 입술이 바짝 말랐다. 침대에 걸쳐 앉은 자세 탓에 엉덩이가 배겨 저리고 허리가 아려올 즘, 그는 이야기를 멈췄다.


[4]

그들은 저녁 7시 용산에서 만나 역 근처 텐동집에 갔었다. 평일 저녁에도 대기가 있는 식당인지라 20분 정도를 기다렸다. 코너 다찌석에 앉아 식사를 했고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역으로 돌아와 커피를 한잔씩 마셨다. 평소 그녀가 좋아했던 영화가 재개봉을 했고 그 영화를 함께 보았다. 완벽한 데이트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날 우리 분위기 좋았거든요? 밥도 맛있었고 커피도 맛있었어요. xx이가 좋아하는 영화까지 봤거든요. 그 영화가 재개봉한 것도 제가 먼저 알고 같이 보자고 했어요. 근데 왜 연락을 안 받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아, 영화 볼 때 잠깐 졸았어요. 그런 걸로 화낼 애는 아닌데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다가 졸았으니까 속상했을 수도 있겠네요. 작가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생각해 보니까 저녁 메뉴가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해요. xx이가 가리는 음식이 은근히 많아요. 근데 텐동엔 가지랑 고추같이 xx이가 안 먹는 채소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어요. 방금 또 든 생각인데 용산에서 7시까지 만난 게 문제 같아요. 사람 많은 9호선을 퇴근길에 타게 만들었으니... 완벽한 데이트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했던 게 하나도 없네요.


[5]

x아, 미안해. 잠깐 여행 다녀왔어. 미리 말 못 했어. 걱정 많이 했지.


야. 씨발. 이건 아니잖아. 미리 말은 해줄 수 있었잖아. 아니 연락이라도 한번 줄 수 있잖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너는 내 생각이라곤 하나도 안 하는구나? 비밀번호는 왜 바꿨는데? 어디 가서 뭐 했는데? 한 달 동안 어디서 뭘 했는데, 이 씨발년아.


xx의 표정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화내지 마. 나 무서워. 눈가에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흘러내리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눈물이 일렁이다가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 무서워. 나 무서워. 나 무서워.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얼굴이 눈물처럼 일렁였다. 얼굴의 전체가 일렁일렁 뱅글뱅글 돌다가 사라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