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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권고사직 ep7.

퇴사 후의 나, 아직은 출시 전 신제품 같다.

by 애지

오늘은 남편에게 부탁해서 저의 시선이 아닌 남편의 시선에서 권고사직 후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점들을 전해드립니다.




퇴사 후 달라진 건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아니었다.

제일 먼저 달라진 건 편의점 진열대에 붙은 가격표였다.


회사 다닐 땐 신제품이 눈에 보이면 그냥 집어 들었다.

먹고 싶든 말든, 언젠가 먹게 되겠지 싶었다.

2+1 행사는 귀찮은 옵션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신제품 앞에서 괜히 멈칫하고, 손은 자연스레 2+1 쪽으로 향한다.


문제는… 그게 늘 맛이 없다는 거다.

꼭 한 캔은 남아 냉장고 구석에서 방치된다.

머릿속엔 오히려 신제품이 계속 맴돈다.


아낀 기분보다 “차라리 신제품 하나 살 걸”이라는 후회가 더 크게 남는다.


편의점에서 시작된 멈칫은 시장에서도 이어졌다.


예전엔 늦은 퇴근길에 급히 들러 아무 바구니나 집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장 한 바퀴를 꼭 돌고 나서야 사과 한 바구니를 고른다.

오징어 한 마리 값이 오르고 내리는 것도 괜히 눈에 들어온다.


정가 아니면 웃돈을 얹어 사던 내가,

이제는 가격표 앞에서 흥정을 하듯 멈칫한다.


낯설지만, 그 순간만큼은 동네 생활자 같아 보인다.


관계에서도 멈칫은 찾아왔다.


가장 난감할 때는 아내와 데이트할 때다.

메뉴판 앞에서 잠깐 멈추는 내 모습이 스스로 민망하다.


예전엔 고민이 없었다.

밥을 먹든, 선물을 사든, “내가 살게” 한마디면 끝이었다.


선배였으니까.

상사였으니까.

연차가 쌓였으니까.


그게 편했고, 당연한 내 역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늘은 내가 사야 하나, 아니면 다음에?”

머릿속 계산기가 저절로 켜진다.


아직도 자동처럼 “내가 살게”가 튀어나오긴 한다.

문제는, 예전엔 습관이었는데 지금은 약간 모험이라는 거다.


멈칫은 결국 시간 앞에서도 나타났다.


퇴사 후 첫 한 달, 시간은 무한하게 생긴 듯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속도가 느려진 것 같았다.


늘 서둘러 마시던 커피를 끝까지 식을 때까지 마실 수 있었다.

걷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멈출 수도 있었다.


그 여유가 달콤했다.

운동도 두 배로 하고, 새로운 공부도 하며 뇌가 깨어나는 기분을 맛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자유가 다시 족쇄처럼 느껴졌다.

“이 많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지?”

멈칫거림은 달콤함 뒤에 따라온 무게였다.


가격표 앞에서, 시장 한복판에서,

메뉴판 앞에서, 그리고 시간 앞에서도 나는 멈칫한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던 나인데,

이제는 그게 일상이 됐다.


어쩌면 이게, 퇴사 후의 나라는 신제품인지도 모르겠다.

가격표도, 시간표도 모두 낯설게 다가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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