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갈래요?” 먼저 선수를 친 여자를 따라 기분 좋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잠시 할 말을 잃는다. ‘혼자 사는 집’ 하면 강력하게 떠오르는 한 장면이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가장 섹시했던 건 손예진이 아니라 손예진이 살았던 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집은 정말 강렬했다. 헌책방 냄새나는 거대한 책장, 오래된 오디오, 적당히 낡고 충분히 푹신한 소파, 오렌지빛 조명, 벽에 무심한 듯 붙어있는 피카소 포스터까지. 이런 집에 한 번 발을 들였는데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내가 처음 그렸던 ‘혼자 살고 싶은 집’ 그림은 영화 속 그녀의 집과 무척 닮았다. 특히 소파에 앉으면 책장이 잘 보이도록 배치했다.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욕실 부분은 욕실과 화장실이 구분되어있는 구조로 나름대로 상상해보았다. 큰 소파를 두고 나니 침대를 둘 공간이 부족해서 2층 침대를 그려보았는데, 침대 밑 소파 공간이 훨씬 아늑해 보이는 게 아닌가(침대에 누우면 천장이 코앞에 있겠지만 어쨌든).
제대로 도면이나 평면 스케치를 배워본 적은 없지만, 삐뚤빼뚤 집 그림을 그리는 건 언제나 즐겁다. 당장 내일이라도 이 상상 속의 집에 들어가 살 것처럼 자세한 동선을 상상하며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손님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주하는 건 현관. 조명은 살짝 어둡게, 양 옆으로 높은 선반과 신발장을 두어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자.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극적인 효과를 높일 수 있겠지. 조명은 모두 간접조명으로 조도를 낮춰서 최대한 아늑해 보이면 좋겠지. 중고로 구한 책과 책장들이 곳곳에 있어서 오래된 책방 같은 분위기가 난다면 좋겠다. 소파는 최대한 낡고 편안한 걸로 두면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부담 없이 앉아 놀 수 있을 거야.
그런 상상을 하며 구상한 혼자 살고 싶은 집 스케치.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스케치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분명 혼자 살고 싶은 집을 그렸는데, 곳곳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장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정말 ‘혼자’ 지내고 싶었던 집이라면 굳이 이렇게 큰 소파를 그리지도 않았을 거고, 굳이 욕실과 화장실을 책장을 칸막이 삼아 가리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타인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렸을까. 이걸 언제 그렸던 걸까 자세하게 떠올려보니 조금 철렁했다. 이 스케치는 내가 프랑스에 유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렸던 그림이다. 그땐 이미 혼자 살고 있었는데 ‘혼자 살고 싶은 집’을 그렸다. 지금 보니 사람들이 찾아와 줬으면 하는 혼자 사는 집을 그리고 있었다. 한 손에 턱을 괴고 슥슥 스케치를 하며, 술이나 커피를 마시면서 소파에 각자의 방식으로 앉고 누워 보내는 날들을 자주 상상했었다. 그리운 친구들, 가족들, 자주 만나고 싶은 다정한 지인들. 그들이 내 방에 놀러 오는 상상을 했다. 당장의 내 방은 그럴 공간도 분위기도 없지만, 스케치 위에서만큼은 좋아하는 이들이 한참을 그 집에서 머물다 가는 게 좋았다.
그 후로도 가끔 ‘지인들이 아지트 삼고 싶은 집’을 상상하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주택 문화에 적응하며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집 스케치에 화목 난로가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어릴 적 살았던 집에도 화목 난로가 있긴 했지만, 그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한 가정집에 초대받았을 때 화목 난로에 홀딱 반해버렸다. 저녁 늦게 차 한잔씩 손에 들고 화목 난로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어두운 탁상 조명이 상대의 얼굴 정도만 겨우 구분할 수 있게 비추고, 화목 난로 창 너머로 일렁이는 불꽃이 방을 불그스름하게 밝혔다. 은은하게 깔린 음악 위로 사람들의 수다가 이어지는 동안, 집주인은 말없이 장작을 적당한 타이밍에 집어넣고는 흩뿌려진 재를 무심하게 쓸어 담았다. 그날 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눠도 감동적이었고, 유쾌한 듯 웃음이 흘러넘쳤다.
고등학교 땐 3명이 한방을 쓰는 기숙사에서 살았었다. 시간만 나면 셋이서, 혹은 다섯 이서, 할 말이 많은 날은 열 명이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에 모여 야식도 먹고 수다도 떨었다. 누군가와 좁은 방에서 매일을 살아간다는 건 항상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편안하게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누던 순간순간은 자주 떠올리며 웃게 된다. 그 기억 속 분위기가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스케치 안에 살아있다. 그때 내가 사랑했던 순간, 친구들을 상상 속 아지트로 불러 모은다. 할머니 집처럼 오래되고 편안해지는 냄새가 나는, 화목 난로의 은은한 따뜻함이 있는 방으로. 모두가 그리워지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