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같은 집

좋은 집이 좋은 사람을 만들까?

by 하지희

만화가는 보통 미리 집이나 건물의 구조를 설계해둔 다음 장면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만화가의 그런 꼼꼼한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인물 뒤로 비치는 인테리어를 자세히 살펴보는 편이다. 만화의 내용이 별로 재미가 없어도 배경 그림이 예뻐서 소장하기도 한다. 가끔 내용도 재미있고 배경도 마음에 드는 만화를 만나기도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그렇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특별할 것이 없다. 어린 나이에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딸과 함께 살게 된 주인공이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준 크고 아름다운 집에 살며 천천히 행복을 찾아간다는 스토리. 이 만화의 즐거움은 디테일에 있다. 각 등장인물 설정의 디테일, 소품과 의상의 디테일, 배경의 디테일. 특히 주인공과 딸이 사는 이 집의 묘사는 디테일의 정점을 찍는다. 작가가 이 집을 먼저 상상해서 만들어 둔 후, 자신의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중간엔 작가가 만화 속 집의 구조도면을 공개하기도 하는데, 보자마자 사진으로 찍어두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등장인물이 사랑스러워서 그랬을까, 그 집은 내게 ‘판타지의 정점’으로 보였다. 사랑스러운, 화목한 집의 표본. 아침저녁으로 순서 싸움할 필요 없는 두 개의 욕실, 숨이 탁 트일 것 같은 높은 천장, 누구나 들어오면 마음이 따뜻해질 것 같은 큰 창으로 둘러싸인 온실. 이런 집에 산다면 늘 평화롭고 마음 너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집에서 자란 주인공이 마음 따뜻한 사람인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꿈꾸던 판타지 속 집을 만났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다른 요소를 곁들여 나만의 버전으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차고는 있어야 하고, 이왕이면 뒷마당을 너르게 만들어서 수영장도 짓고, 우린 야외에서 식사하는 걸 좋아하니까 주방을 뒷마당 테이블과 가까이 배치해야지.


이쯤 되면 금전적인 부분이 걱정되어야 할 텐데, 당시 내겐 그런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만화는 정말 디테일해서, 금전적 문제의 디테일도 분명 언급하는 데 말이다. 주인공은 이 집에 부모님과의 추억이 담겨 있어서 이사 가지 않았지만, 세금과 유지비 때문에 이리저리 고생이 많다. 그런데도 난 차고에 수영장, 너른 땅까지 추가했으니. 집이 아름다워서 주인공이 사랑스럽게 자라난 것은 분명 아닐 텐데, 난 그때 좋은 집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을 맹신했다.




정말 좋은 집이 좋은 사람, 좋은 가족을 만들까? 그럼 좋은 집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가 그린 집처럼 정말 판타지를 모두 실현한 집이 좋은 집일까?


지금도 좋은 집은 무엇이다,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하나 있다. 나와 우리에게 좋은 집은 무엇일까,라고 자주 그리고 오래 고민한 사람이 만든 집은 분명 좋은 집이 될 거라는 것. ‘우리’에는 가족이나 지인, 이웃 그리고 환경을 더 넓게 포함하면 할수록 더 좋은 집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고민은 ‘디테일’에 자주 머물러야 할 것이다. 나와 가족의 생활 습관 디테일이 잘 반영된 집, 이웃이 추구하는 디테일과 잘 어우러지는 집, 현재 환경에 도움이 될 만한 디테일이 담긴 집.




이 그림은 내가 7년 전에 그린 그림이다. 지금 내 ‘판타지의 정점’을 찍은 집을 그려본다면 무척 다른 모습일 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 그림은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 고민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좋은 집은 크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집이라는 환상이 과하게 드러나는 그림이라 조금 민망해지긴 하지만, 당시 고민했던 디테일들은 여전히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자주 초대하며 살았으면 해서 큰 테이블을 집 중앙에 놓은 점, 손님을 위한 방에도 반드시 발코니를 달아둔 점, 편히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문을 여러 개 달아놓은 점 등등.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디테일들은 바로 이런 마음씨였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던 주인공을 가장 아름다운 존재처럼 감싸 안아준 집의 디테일들. 크고 멋지고 화려해서가 아니라, 서재 다락에 딸을 위해 아껴둔 소품 가방을 숨겨둔 마음 같은 것이 그 집을 사랑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된 만화이고, 읽은 지 한참이나 되었지만, 요즘도 ‘아름다운 집’하면 이 만화 속의 집을 떠올린다. 사랑스러웠던 인물들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집. 작가가 도면까지 그려가며 하나하나 디테일을 상상하고 고민해서 만들어진 좋은 집. 나만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찾을 때까지 오늘도 집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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