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내가 도시의 고층 빌딩에서 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가끔 이런 집에 산다면 어떨까 하고 상상하곤 한다.
위치는 상관없다. 지하철역이 멀어도 괜찮고 힙한 가게가 주변에 없어도 괜찮다. 대신 이것만은 고집하고 싶다. 집에서 입던 차림 그대로 나가도 괜찮은 동네 서점 혹은 도서관이 있는 동네. 채소 가격이 아무렇게나 상자 조각에 쓰여 있고 두부 삶는 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시장이 있는 상권. 빌딩과 빌딩 사이의 간격이 적당해 햇빛이 고르게 들어오는 골목. 이런 도시라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집 크기도 상관없다. 방이 하나여도 괜찮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고층이어도 괜찮다(한국에선 매우 드문 건물이겠지만). 대신 이것만은 가져보고 싶다.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는 정도의 거리에 도시 풍경이 보이는 큰 통창. 그 통창 바로 앞에 달린 소박하고 편리한 주방. 주방과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책장. 이런 집이라면 얼마간 살아보고 싶다.
책의 좋은 점 중 하나는 펼치지 않아도 책이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책 안에 담긴 내용만으로도 책의 역할은 충분할 텐데도 바깥 모습마저도 어떤 역할을 한다. 매일 바라보는 곳, 하루에도 몇 번씩 시선이 닿는 곳에 책이 꽂혀 있다면? 그것도 무척 좋아하고 힘이 되고 보면 기분 좋아지는 책의 책등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면? 또 일어나서 설거지하고 끼니를 차려야 한다는 우울함을 싹 가시게 만드는 문구(제목)가 착착착 놓인 책장이 그곳에 있다면?
‘의衣식食’을 받쳐주는 ‘주宙’ 보다는, ‘책冊식食’을 위한 ‘주宙’. 이 두 가지가 극대화된 장소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최적의 구조를 떠올려보자. 우선 책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은? 책장이다.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주방이고. 그렇다면 주방에 책장을 두면 해결될까? 문제가 하나 있다. 주방은 주로 집의 한구석에 몰려있어서 자주 바라보게 되는 장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방엔 어쩔 수 없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장면도 자주 연출되기 마련이다. 설거지하고 아직 덜 마른 그릇들이 널려있는 건조대, 크고 시끄러운 냉장고, 어젯밤 마시다 남긴 술병 같은 것들. 주방이 구석에 위치해있을 땐 이 모든 장면이 어느 정도 가려져 있을 수 있었지만, 주방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하면 이런 생활의 흔적들과 계속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책과 요리가 잘 어우러지면서도 자주 바라보아도 신경이 거슬리지 않게 배치할 수 있을까. 도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깐, 그렇다면 내가 제일 오랫동안 바라보는 집의 장면이 어디일까? 창문. 보통은 창문 앞에 책상을 두거나 소파를 둔다. 나도 자연스레 창문을 바라보는 위치에 작은 소파를 두었다. 여기다.
큰 통창이 뚫린 벽에 주방과 책장을 두자. 깊이 70 정도의 넓은 수납장을 통째로 짜 넣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에 세면대만 적당히 뚫고 조리는 휴대용 인덕션으로 해결한다. 냉장고는 미니 냉장고를 집어넣거나 아니면 저 멀리 잘 안 보이는 구석으로 숨겨버리면 그만이다(어차피 작은 원룸에 크고 시끄러운 냉장고는 숨기는 게 제일이다). 자주 쓰고 예쁜 그릇은 선반에 놓고 나머지 조리도구는 다른 곳에 두어도 된다. 이제 남은 자리에 책을 잔뜩 꽂는 거다. 핀란드 여행 가서 산 머그잔 세트 옆에 시집 몇 권. 영롱한 무쇠 냄비 옆에 추억의 만화책 한 세트. 예술 작품 같은 와인잔 옆에 황홀한 추리 소설 한 뭉치. 여기에 바깥으로 적당한 풍경이 보이는 통창까지. 크흐.
주말이면 슬렁슬렁 일어나서는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편한 차림 그대로 집을 나선다. 먼저 책방에 들러 새로 나온 신간도 구경하고 다른 손님이 사는 책도 기웃거리다 마음에 드는 책 한두 권을 사서 나온다. 시장에 들러 갓 삶은 두부 한 모와 추천받은 나물 몇 가지를 사서 꼬마 김밥 하나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온다. 테이블에 사 온 먹거리와 책들을 모두 쏟아붓고는 하나씩 맛보고 즐기다 간간이 창밖을 내다본다. 한가한 주말 거리 풍경을 감상하다 지금을 나누고 싶어 지면 근처에 사는 친구 하나를 부른다. 싱크대엔 어제 먹고 놓아둔 그릇들이 몇 개 쌓여 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흥미진진한 책장의 메시지들과 통창 너머 산뜻한 주말 풍경이 시선을 끌어줄 테니까. 아, 이런 집이라면 정말이지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