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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자 Dec 27. 201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5가지 작품 3편

지난 번에 이어 계속 1층의 갤러리들 위주로 살펴보겠습니다.


11. 페르넵의 무덤 (Mastaba Tomb of Perneb), Gallery #100


이집트관을 들어서자마 정면에 보이는 무덤입니다. 기원전 약  2381–2323경에 지어진 것으로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25마일 정도 떨어진 사카라 (Saqqara)지역에 있던 무덤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에 살던 왕과 귀족들을 위한 거대한 공동묘지 (네크로폴리스; Necropolis) 였습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나일강을 따라 관광객이 가장 많이 가는 기자(Giza)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옵니다. 아래 지도에서는 왼편 제일 아래 사카라와 멤피스가 보입니다.

특히, 초기 피라미드 형태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계단형 피라미드인 조서의 피라미드 (Pyramid of Djoser, ca. 2667–2648 BC)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페르넵의 무덤은 계단식 피라미드보다 앞선 형태의 무덤으로 마스타바 (mastaba)라고 불리는 양식으로 지어진 무덤입니다. 마스타바는 영원의 집 (house for eternity)이라는 뜻으로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이 단층으로된 무덤입니다. 이 양식이 나중에 계단식으로 변모되고 나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정사각뿔 형태로 완성됩니다.

마스타바는 무덤이기도 했지만 죽은 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지상에는 입구가 보이고 지하에는 무덤이 있고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옷, 음식 등도 같이 묻었고 죽은 이의 조각상을 넣어 영혼이 머물 곳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1913년 이집트 정부를 통해 구매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오게 된 페르넵의 무덤을 통해 마스타바의 내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면 몇 개의 방이 있고 가족들이 페르넵을 위해 제를 올리고 공물을 바치는 방과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스타바 입구를 지나면 작은 정원이 있는데 사방이 벽으로 둘러쌓여져 있고 하늘 부분은 뚤려 있습니다. 각 벽에는 문이 있고 작은 방들로 연결됩니다. 무덤이지만 집처럼 설계한 것입니다. 고인이 사는 사후세계의 집인 셈이죠.

페르넵은 왕의 수행원으로 의복과 왕관을 담당하는 고관이었습니다. 페르넵은 무덤이 완성되기 전 죽었습니다. 따라서 무덤 내부 곳곳은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곳이 많습니다. 입구를 지나면 나오는 작은 홀에서도 보이듯이 상형문자도 빨간색으로 밑그림만 그린 채 미처 색칠을 하지 못했죠.

이 홀을 지나 옆으로 난 작은 문을 건너면 제사를 드리는 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방 안에 공물을 올리는 벽이 나옵니다. 중앙에 움푹 들어간 곳이 죽은 이의 영혼이 나와 공물을 받는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문의 형태로 만들었지만 다른 곳으로 연결된 문은 아니고 상상의 문 (false door)인거죠.

 

이 가짜문의 아랫부분에 그려진 4명의 남자는 전부 페르넵의 초상입니다. 공물을 바치기위해 온 사람들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을 나온거죠. 이 무덤의 정문에도 페르넵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시 제사를 올리는 방으로 돌아와 공물을 바치는 가짜문의 옆 벽면을 보면 페르넵이 공물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크게 그려진 인물이 페르넵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해서 그렸습니다. 페르넵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제일 크게 그린거지요. 고대 이집트 미술의 주요 개념 중 하나로 계층적 비율(Hieractic scale; Hierarchic Scale)이라고 합니다.

페르넵의 앞에는 공물로 바친 빵 덩어리가 쌓인 탁자가 놓여져 있고 그 탁자 밑에는 공물의 품목이 적혀있습니다. 빵, 맥주, 소고기, 가금류, 리넨과 같은 옷 등 사후 세계에서도 페르넵은 풍족하게 사는겁니다. 인물들 위로는 끝도 없는 빵, 과일, 생선 등의 공물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페르넵 앞에 줄을 지어 서있는 인물들을 보면, 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는 제사장으로 뒤에 사제가 부어주는 정화수로 공물을 바칠 제단을 닦고 있습니다. 그 뒤의 사제는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에 적힌 주문을 낭독하고 있네요.


12. 테라코타 술 항아리 (Terracotta oinochoe (jug)), Gallery #158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관에 가면 수많은 조각상과 더불어 많은 항아리들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사를 공부하면 주요하게 다루는 부분이 바로 이 항아리 스타일의 변천사입니다. 대부분의 항아리들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신전에 바치는 공물을 담거나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 혹은 페스티벌에서 쓰이는 것들입니다. 아래 보이는 작품은 오이노코에 (Oinochoe)라고 불리는 술을 담는 항아리입니다. 오이노코에는 대부분 테라코타 기법 (terracotta;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굽는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고대 그리스 도기는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 무렵, 양식적으로 크게 붉은 그림식 (Red Figure)과 검은 그림식 (Black Figure)로 발달합니다. 항아리 겉면에 그림을 그릴 때, 배경은 검게, 인물은 붉게 그리는 스타일과 반대로 배경을 붉게 인물을 검게 그리는 것입니다. 위의 기원전 4세기 중반 만들어진 오이노코에는 붉은 그림식 입니다.


이 항아리는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Attic)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항아리에 그려져 있는 인물들은 이 지역의 페스티벌인 디오니소스제 (Dionysian)를 나타내는 인물들입니다. 이 제전에는 큰 행렬이 있었는데 가운데 몸이 거의 다 비치는 망토를 입고 있는 여성이 의식에서 행진을 상징하는 폼페 (Pompe, the female personification of a procession)이고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 술의 신, 디오니소스 (Dionysos)입니다. 날개를 달고 샌달을 신고 있는 반대편에 있는 인물은 사랑의 신, 에로스 (Eros)입니다. 에로스 앞에는 바구니가 놓여 있는데 제물을 넣어 행진하는데 쓰이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에로스가 디오니소스에게 화살을 날려 한 소녀 (아우라, Aura)와 사랑에 빠지게 하고 올림푸스로 날아간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항아리에 그려진 에로스가 샌달을 고쳐메고 있는 것은 이제 막 날아가려는 장면을 포착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양한 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 항아리는 디오니소스 숭배 문화를 보여주고 있고 디오니소스제는 가장 규모가 큰 것 중 하나였습니다. 디오니소스 미스테리 (Dionysian Mysteries)라고 불리는 문화로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며 이와 관련된 제사나 행사 기간동안 술도 많이 마시고 음악과 춤을 통해 최면 상태에 이르기도 하는 등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디오니소스제 동안 행진을 하면서 물, 술, 빵 등의 공물을 나르는데, 위의 오이노코에는 술을 나르는데 쓰였던거죠. 축제 기간동안에는 비극과 희극같은 연극 공연도 개최되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려보면 디오니소스 (로마시대에는 바커스 Bacchus)와 에로스 (로마시대에는 큐피드 Cupid)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폼페(Pompe)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폼페는 고대 그리스 도기에만 나타나는 인물입니다. 이 오이노코에가 만들어진 기원전 4세기 중반은 고대 그리스 여신이 나체로 표상화되기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대표적으로 프렉시텔레스 (Praxiteles)의 아프로디테 (로마시대에는 비너스 Venus)가 있고, 메트로폴리탄의 오이노코에 보이는 폼페 역시 당시의 트렌드를 반영해 겉옷을 입고 있기는 하나 나체로 표상됩니다.

 

두 여신의 포즈도 주목해야 하는데, 한 쪽 다리를 살짝 구부리고 다른 쪽 다리로 무게를 지탱하는 자세는 콘트라포스토 (contrapposto)라고 해서 예전 코우로스 (Kouros)에서 보이는 딱딱한 자세에서 훨씬 더 인간 신체의 입체감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포즈로 기원전 480년 경 처음 등장한 이후 서양미술 특히 조각상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3. 헨리 8세의 갑옷 장식 (Armor Garniture, Probably of King Henry VIII of England), Gallery #37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층에는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미술관 외에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는 무기와 갑옷관 (Arms and Armor)이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미국에서 가장 큰 16, 17세기 유럽 갑옷들과 무기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의 헨리8세 (Henry VIII, 1491-1547)가 설립한 영국 왕실 무기고 (English Royal armory)에서 만든 그리니치 갑옷들 (Greenwich armors)이 유명하고, 이탈리아에서 주문 제작해 헨리8세가 1544년 깔레에서 프랑스군과 전투 중 입었던 갑옷이 있습니다. 그리니치 갑옷은 판금갑 (plate armor)이라고해서 전신을 철이나 강철로 된 판으로 뒤덮는 식의 갑옷으로 100년 전쟁때 유럽에서 발명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갑옷 역시 1527년 무렵 헨리8세를 위해 만들어졌고, 갑옷의 디자인은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헨리 8세가 왕실 무기고를 설립했을때 무기와 갑옷을 만들거나 디자인한 사람들은 이탈리아, 플랜더스, 독일에서 데려온 장인들이었습니다. 이 갑옷을 헨리 8세는 런던의 프랑스 대사에게 선물로 주었고 대사의 사후 친구에게 넘어갔다가 그 친구의 후손들이 191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판매하게 됩니다.

강철, 금, 동합금,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 견고한 갑옷과는 별도로 남성의 생식기 보호구(mail brayette)는 1927년 폴란드의 라즈비 왕실 자손 스타니슬로 알브레히트 라즈비 왕자(Prince Stanisław Albrecht Radziwill, 1914-1976)가 기증한 것입니다.

장갑 혹은 토시 (gauntlet; manifer)도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왼쪽은 창을 들고, 오른쪽은 칼을 드는 용도로 쓰입니다.

도금도 가까이서 보면, 얼마나 정교하게 세공이 되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가슴판에 세겨져 있는 코끼리가 보이시나요?

이 갑옷에서 또 주목해야할 부분은 창 받침대 (lance rest)가 가슴판에 부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왼편에 꺽쇠 형태로 되어 전쟁 중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수평으로 들 수 있도록 받쳐놓는 것입니다.

이 갑옷의 주인인 튜더가 (House of Tudor)의 헨리8세는 아마도 영국의 왕들 중 가장 많은 야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일 겁니다. 블러디 메리 (Bloody Mary)로 알려진 메리 1세 (Mary I, 1516-1558)와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1603)의 아버지이자, 이혼 문제로 로마 카톨릭교와 절교하고 영국 성공회를 창립한 인물이죠. 그가 왕위에 오른 1509년은 조선에서는 3년전 연산군이 죽고 중종이 재위한지 4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여섯번이나 결혼한 이 군주의 인생에서 로댕의 작품을 통해 소개한 프랑스의 항구도시 깔레 (Calais)는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가 형수이자 첫 아내였고 메리1세의 어머니였던 아라공의 캐서린 (Catherine of Aragon, 1485-1536)과 이혼을 하고 나중에 엘리자베스 1세를 낳게 되는 그녀의 시녀였던 앤 불린 (Anne Boleyn, 1501-1536)과 결혼을 하려고 깔레로 가서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와 1세 (Francis I, 1494-1547)를 만나 로마 카톨릭교가 반대하는 그의 이혼과 결혼을 지지해주기를 부탁합니다. 튜더가문과 발루아가문은 친척관계이기도 했지만 백년전쟁의 여파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8세가 프랑수아1세를 만난 이유는 아라공의 캐서린은 합스부르그 가문출신으로 당시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왕인 카를 5세가 그녀의 조카였고 자신의 이혼을 도와줄리 만무했기에 일시적인 우호관계를 맺은 겁니다. 16세기 유럽의 이 세 군주는 서로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깔레에 다녀와 바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해인 1533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성대하게 한 번 더 거행하고 엘리자베스1세도 태어나지만 이 결혼은 3년 뒤 아들을 유산한 앤을 헨리8세가 각종 죄목을 씌어 처형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1542년부터 4년간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프랑수아1세의 프랑스와 오토만 제국 (Ottoman Empire)의 술레이만 1세 (Suleiman I)가 연합하여 영국의 헨리8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동맹과 밀라노 공국 (Duchy of Milan)의 패권을 놓고 싸운 전쟁입니다. 1544년 헨리8세는 깔레를 공격하기위해 그리니치 갑옷을 입고 전장에 참여합니다. 전쟁은 양측에게 다 막대한 손실을 남기고 끝납니다. 영국은 파산상태에 이를 정도였죠. 그로부터 3년뒤 헨리8세는 55세로 숨을 거둡니다. 깔레 전투에서 입었던 갑옷 역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371번 방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2007년 미국의 케이블채널 HBO가 튜더가문 특히 헨리8세 시기를 다룬 드라마 시리즈인 튜더가 (The Tudors)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헨리8세는 엘리자베스1세와 더불어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죠. 이제 갑옷도 눈여겨 보게 되지 않을까요? 


14. 테세 호텔의 응접실 (Grand Salon from the Hôtel de Tessé, Paris), Gallery #528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층에 522–529, 531–533, 그리고 545–547번 방은 17, 18세기 프랑스의 다양한 빌라나 살롱을 그대로 재현한 곳입니다. 가구와 카페트, 벽의 몰딩, 장식품까지 당시 귀족들의 삶을 엿볼수 있는 곳이죠. 그 중 파리의 테세 호텔의 응접실이 있는 528번 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768-72년 경에 만들어진 이 저택은 프랑스의 로코코 시기에 지어진 것입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태동한 로코코 스타일 (Rococo)은 귀족들을 위해 만들어진 양식입니다. 회화나 조각 뿐 아니라 건축과 실내 디자인, 가구에도 드러나는 스타일로 귀족들의 화려한 취향을 맞추기 위해 태어났죠. 로코코 (Rococo)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인 바로코 (barocco, 바로크의 어원, 기이한 모양의 진주를 뜻함)와 프랑스어 로카이 (rocaille, 조개껍질과 자갈로 만든 장식품)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련되고 멋진 양식을 의미하며 18세기 유럽에서 살롱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인기를 얻게 됩니다. 루이 14세 정권말기에 프랑스 건축 양식으로 시작해 루이 15세 통치 기간 동안 번성한 양식입니다.


프랑스의 왕실 족보에 있어서 국왕의 동생은 오를레앙 공작 (Duke of Orleans)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습니다. 발루아 가문이나 부르봉 가문 출신들로 만약 국왕이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 없이 죽는다면 오를레앙 공작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1715년 태양왕 루이 14세가 죽고 왕위는 그의 손자인 루이 15세가 물려받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당시 오를레앙 공작은 루이14세 동생의 아들 필립2세 (Philippe II, Duke of Orléans, 1674-1723)였고 그가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되자마자 했던 것은 베르사유 궁전을 벗어나 파리로 이사오는 것이었습니다. 교외 생활에서 벗어나 도시로 오기를 열망했던 많은 귀족들 역시 파리로 이사 오면서 저택을 짓기 시작하고, 로코코 스타일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이 때 귀족들의 타운하우스를 프랑스어로 오뗄 (Hôtel)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어식으로 호텔과 유사하지만 손님을 위한 숙박시설이 아닌 귀족의 저택을 일컫습니다.

이 귀족의 저택은 사교의 장소로서 거의 매일 밤 각종 파티, 음악회, 무도회 등의 행사가 열렸고 이런 행사들은 살롱 (salon)이라고 불리는 응접실에서 이뤄졌습니다. 살롱에서 예술과 문화에 대한 취향을 교류하고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게 되어 살롱문화라는 말이 나왔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외에 뉴욕의 프릭 미술관 (Frick Collection)에 가면, 로코코 양식의 저택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루이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후작부인 (Madame de Pompadour, 1721-1764)과 루이 16세의 정부였던 바리 부인 (Madame du Barry, 1743-1793)의 저택 일부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테세 저택은 세느강 서쪽편에 있던 테세 백작부인의 집으로 화재로 손실된 건물을 1765년부터 3년간 새로 지은 것으로 아직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세느강의 건너면 바로 루브르 박물관이 나와서 루브르 다리라고도 불리고 영화 다빈치 코드에도 나온 꺄후셀 다리 (Pont du Carrousel)를 건너면 바로 있습니다.

벽의 몰딩과 거울을 둘러싼 테두리, 샹들리에, 촛대, 가구, 탁자 등 전부 다 당시 귀족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거실의 창문에는 커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창너머로 센느강과 루브르, 튀일리 궁전 (Tuileries palaces)이 들어오는 조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거실은 1942년 메이시 백화점 (Macy’s)의 상속자 허버트 스트라우스의 부인 (Mrs. Herbert N. Straus)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뉴욕의 부자들은 로코코 양식의 유럽 저택에 열광했죠.

트럼프의 펜트하우스도 바로 이 로코코 양식임을 볼 수 있습니다. 루이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고 하는데, 프랑스 혁명의 시초는 바로 이 루이14세때부터였죠.


15. 고대 로마 빌라의 침실 (The Cubiculum Nocturnum), Gallery #165


그리스, 로마관에서 로마 시대를 엿보기 위해 이탈리아의 폼페이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보스코레알레 (Boscoreale)로 가보겠습니다. 나폴리현에 속하는 도시로 베수비오 산 (Mount Vesuvius)아래 있으며 베수비오 국립공원 (Parco nazionale del Vesuvio)에 위치해 있습니다. 나폴리 와인인 라크리마 크리스티 (Lacrima Christi)의 포도밭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베수비오산이 보이시나요?


반 마일 정도만 아래로 내려가면 폼페이가 있고, 79년에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수많은 로마의 유적지가 화산재 아래 뒤덮이게 되죠. 폼페이는 잃어버린 도시로 알려지다가 16세기 말과 18세 중반부터 재발견되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폼페이에 관광을 가면 고대 로마 제국의 유물들과 많은 빌라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보스코레알레에는 특히 귀족들의 빌라가 많이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빌라 (villa)라고 하는 건축물은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의 풍광과 전원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도시에서 빌라를 지을 때는 반드시 정원이 들어가야 했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는 기원전 50-40년 경에 지어졌다고 알려진 파니우스 시니스터의 빌라 (Villa of P. Fannius Synistor at Boscoreale)에 있었던 침실을 볼 수 있습니다. 1900년대 초에 발견된 이 집의 주인은 로마제국의 다른 귀족들처럼 이 빌라 말고도 여러 채의 다른 빌라를 별장 (country house)처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화려한 벽화가 단연 눈에 띄는데 집주인의 취향을 보여줍니다.

이 벽화들은 고대 로마 폼페이 벽화 양식 중 두번째 스타일 (the late Second Style)로 그려진 것으로, 기둥이나 벽의 장식물들이 실제처럼 그려져 서양미술에서 트롱프 뢰유 (trompe-l’oeil) 즉, 눈속임 그림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테이블이나 선반 위의 유리병이나 과일 바구니 등도 마치 실제인 것처럼 그려서 이 집을 방문한 손님들은 그림의 사실성에 감탄을 했을테죠.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원근법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이니까요. 로마 귀족들은 공적 영역에서는 검소하고 실용적인면을 강조했지만 본인의 집에 돌아와서는 아주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와 취향을 숭상했는데, 벽화에 보이는 기둥이나 건축물의 유형 모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산물입니다.

벽화의 세부를 보면, 여신 디아나 루치나 (Diana Lucina)가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의 노란색 조각상이 신전안에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사냥의 여신이었던 아르테미스 (Artemis)가 고대 로마에서 디아나로 불리게 되며 달을 관장하는 여신이 됩니다. 로마인들은 이 여신을 루치나 (Luchina)를 붙여 출산의 여신으로 불렀습니다.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디아나가 출산의 여신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는 그녀가 달의 여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 주기와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이었죠. 이 벽화가 그려진 곳이 침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디아나 루치나상은 적절한 선택이죠.

이 집이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기원전 50-40년경은 고대 로마사에 있어서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뀌는 시기였습니다. 바로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 100-44 BC)가 삼두정치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루비콘 강을 건너며 기원전 49년에 내전을 일으키지만 5년후 암살당하죠.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69-30 BC)가 살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후 격동의 시기를 거쳐 기원전 29년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 (Augustus; 63 BC-14 AD)가 로마 제국을 설립하고 시저는 신격화됩니다.


당시 한반도는 고구려 (37 BC-668), 백제 (18 BC-660), 신라 (57 BC-935)가 막 건국되던 시기였고, 중국은 한나라 시기 (206 BC-220)로 기원전 30년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 실크로드를 통해 로마 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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