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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COCO Aug 14. 2019

(독후감)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유난스러워서, 예민해서 기분이 나쁜게 아니구요  


무더운 여름이었다. 삼복 더위에 여덟 명의 시가 식구들을 따라 나선 여행지는 설악산이었다. 자꾸만 안아달라고 보채는 세살 아들을 달랬다 안았다하며 주차장에서 산 입구까지 가는데만도 이미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당장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쉬고 싶었다. 안아주다가 잠깐 내려놓은 사이, 자갈밭에 팍 넘어져 우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폭발했다. 죄없는 아이를 향해 걱정 대신 악마같은 살의를 느꼈다. 


그 여행은 지독하게 배려 없는 것이었다. 나이 든 부모님과 세살짜리 아이를 이끌고 여름의 산이라니.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즐거운척 할 수도 없었다. 어서 해가 지고 오늘 하루가 끝나기만을 바랬다. 

시부모님은 평소와 달리 무표정한 나를 다독였다. 내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형님이 혼자 뒤쳐져 있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 왜 그래? 니가 뭔데? 니가 뭔데 우리 부모님이 니 눈치를 보게 해?" 


나는 놀라고 당황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 때까지 내가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 날 이후로 내가 형님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형님 뿐 아니라 모든 배우자의 식구들에게 새삼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 그녀는 왜 나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했을까? 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정확한 이유를 이 책 속에서 찾았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 사람들도 '시가'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순간 관계가 기이하게 왜곡되는 것은 바로 이 높낮이 때문이었다. 한쪽은 '네가 감히?', 한쪽은 '네가 뭔데?'라는 질문을 품게 되는 이 관계. 서로에 대한 괘씸함과 모멸감으로 무장한 채 마주하게 되는 이 계단. (p.157)


배우자의 누나가 나에게 했던 "니가 뭔데?"의 속 뜻은 "니가 감히" 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내가 느낀 분노는 "니가 뭔데?" 였다. 정확히 그랬다. 


"당신 결혼했어, 안 했어? 결혼했으면 당신은 내 아랫사람이야! 내가 이 집의 큰 사람으로서 말하는 거야!"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대체 재현과 수진이 생각하는 '윗사람'은 뭘까? 돈이 걸린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말처럼 나에게 일을 시킬 것도 아니면서, 왜 '윗사람'이 되기를 고집하는 걸까? 위와 아래가 아닌 다른 인간관계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걸까? .... 결혼을 한다는 것은 곧 가부장의 질서를 승인하는 것일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방법밖에 없는 걸까? (p. 202, 203) 


나는 결혼 관계 속에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때면 종종 내 탓을 했다. 

'이봐, 결혼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가 아니라는 것쯤 너도 알고 시작했잖아? 이제와서 왜이래? 결혼이 원래 그런거잖아. 억울하고 불합리한거야. 니가 선택한 거야. 누구 탓할 것 없어.' 

그래서 참았던 것 같다. 다 그런 것이라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나의 분이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서 시가에 포함되는 새 식구가 아니다. 외교관같은 방문 사절단이다. 이국의 남자를 사랑해서 그의 가족을 방문하는 먼 나라의 여자일 뿐이다. 그녀를 낯선 나라의 서열 속에 끼워넣어 누구의 위인지 아래인지 정하거나 그것을 강요할 근거는 없다. 


가족 구성원이 늘어나고 복잡한 호칭 관계가 만들어지고 나니, 남자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위계를 정하는 관습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전에 내가 두현의 부모님을 '어머님'과 '아버님'이라고 부를 때 장유유서의 관습만을 의식했다면, '아주버님-제수씨'와 '형님-동서' 호칭에서 느낀 것은 배우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전락했다는 감정이었다. ..... 막연하게 가슴 속에 떠돌던 기분은 점점 구체적인 질문으로 떠올랐다. 나는 두현의 가족들과 평등한 관계로 만나고 있는 걸까? (p.29) 


몇년 전 격렬한 부부 싸움 중이던 우리 부부를 시어머니가 찾아왔다. 그 때 나는 이혼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으면서 한편으로 그런 결론을 피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내가 참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시어머니는 긴 훈계의 말씀 끝에 나에게 형님을 찾아가 사과하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형님에게? 시어머니나 시아버니께 죄송한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겠지만 왜 형님에게 맥락없이 사과를 해야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시어머니는 형님이 손윗사람이니 그간 마음 고생시켜 죄송하다 먼저 사과를 하라고 했다. 그 대목에서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이번 한번으로 끝날 문제가 아님을. 안타깝지만 나 또한 이 불합리한 관계를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결국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모멸감을 견디면서 '정상 가족' 형태를 지키고 싶지 않았다. 이혼을 결정했고 남편을 비롯한 김씨 가족과 나는 남이 되었다.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고 윗사람 행새를 하던 그들은 모두 단박에 내 인생과 아무런 상관없는, 지나가는 행인과 동일한 위치로 돌아갔다. 우리는 서류로 엮인 관계였을 뿐이다. 


흐느끼는 두현 앞에서 나는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두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고단함이 밀려왔다. 나는 이 사람이 나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을 약점이라 생각하는 걸까? 그것을 빌미 삼아 한 사람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는 걸까? 한국 사회의 여자와 남자라는 자리. 며느리와 사위라는 자리. 동서와 도련님이라는 자리. 그리고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나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너. 이토록 울퉁불퉁한 지형 위에서 너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P.223)


저자인 배윤민정님과 배우자는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맞는지, 그러니까 애정의 문제가 아닌 제도로써의 결혼 상태를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지원자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호통치거나 폭력으로 억압해서는 안된다. 

대체 누가 그렇게 하느냐고? 

바로 당신이. 사회가. 가부장제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예의라는 이름으로, 평화라는 이름으로 여자들의 입을 틀어 막았다. 

제 생각을 시원히 말을 못한 여자들은 화병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렸다.


저자는 이 책을 내고 나서의 소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늘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별로였어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하고 무기력한 기분. 결혼을 하고 나면 나아질까 기대하기도 했는데 똑같았어요. 그냥 내 성격의 문제인가보다 싶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내고 나서부터 그런 기분이 사라졌어요."


바로 이것이다. 더 이상 쭈구리로 살기 싫으면 내가 여기 있다고 튀어나와야한다. 

그녀는 더 이상 조용히 있지 않기로 결심했다. 

좋은게 좋은 거라며, 나 하나만 참으면 그만이라고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숨거나 외면하지 않고 싸움을 각오했다. 

그러자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내 편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가 유난스러워서, 유별나서, 까다로워서, 자격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는 사실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부담스럽지 않은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게 된 것이리라. 


더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건방지게,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별것도 아닌 문제를 떠들어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 나도, 나도, 나도 그렇게 느겼다고 공감하고 싶다. 


Illustration by Bodil Jane for UNFPA




배윤민정님의 이 책은 본래 여성 민우회 게시판에 연재한 4편의 에세이를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덕분에 민우회 홈페이지에 처음 들어가보게 되었다. 여성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http://www.womenlink.or.kr/


배윤민정님의 1년간의 가족 내 호칭 투쟁기는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주제와 별개로 단단하고 꾸밈없는 글이라서 읽는 내내 감탄했다. 한번도 전문적으로 글을 써보지 않았다는 사람이 써낸 첫번째 책이라니. 명료한 문장과 빠른 전개로 술술 읽힌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는 책이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74083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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