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제작한다면?
내가 주인공인 영화는 역사 판타지 장르입니다. 역사 영화에서 흔히 다루는 전쟁 이야기는 아니고요. 판타지이지만 마법 이야기도 아닙니다. 나는 <모든 것의 새벽> 저자가 파헤친 인류의 선사 시대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의 새벽>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 책에서 인류의 선사 시대를 다루는데요. 상식처럼 알고 있는 여러 가지를 반증합니다. 시작은 인류의 새벽이 홉스의 말처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상태가 아니었다고요. 루소의 주장처럼 순진무구한 무지의 상태도 아니고요. 놀랍지 않나요? 나는 놀랍고 흥미로웠어요. 이 책을 읽고, 여러 사람과 마구마구 나누고 싶었지만 900쪽에 가까운 벽돌책이라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책의 내용에 기반한 영화를 만든다면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요?
영화는 숲속 깊은 곳, 거대한 나무가 우뚝 선 곳에 작은 집들로 시작합니다. 버섯으로 지은 집, 나무 껍질로 덮은 집, 돌과 흙을 쌓아 올린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입니다. 건축 재료는 다양하고, 단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집의 크기는 엇비슷합니다. 나는 마을의 평범한 주민 1인데,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마을 한가운데는 커다란 나무와 신전이 있는데, 신전엔 신녀 뿐 아니라 몸이 불편하거나 독특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삽니다. 그들은 때때로 번뜩이는 영감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곤 해요. 유용하다기보다 신비로운 통찰이 들어 있어요. 이들이 죽으면 영원한 잠의식(장례)을 치뤄요. 화려한 물건들과 함께 땅 깊은 곳에 묻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엔 없는 의식입니다.
이곳의 하루는 규칙적이지만 자유롭습니다. 아침과 낮의 일부는 공동체를 위해 쓰고, 남은 시간은 오직 나를 위해 사용합니다. 춤추고 노래하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왕과 이웃, 형제자매, 이웃과의 다툼과 해결 방법, 사냥과 채집, 농사 등 다양합니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잘못은 무고죄인데요. 누구든 없는 죄를 만들다 걸리면 큰 벌을 받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어서 어떤 벌이 적당한지 한참을 의논한 일이 있었어요.
참, 이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짓긴 짓는데 놀이에 가깝습니다. 땅에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는 강제 노동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땅을 길들여 작물을 심는 대신, 숲과 강, 계절의 변화를 읽으며 이동하고 채집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냥이나 채집을 못하는 신전의 사람들까지도 먹고 지내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노동시간이 현대인의 1/3에 불과해요.
마을 사람들은 원할 때 어느 곳으로든 이동할 수 있고, 권력에 불복종할 수 있으며, 누구든 생산방법과 정치시스템을 구성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마을과 마을, 부족과 부족 사이에는 환대의 네트워크가 넓게 펼쳐져 있어요. 방문객을 맞이하고, 서로의 지식을 나누며, 필요할 때 서로를 보호하고 돕습니다. 이런 네트워크망이 있으니 현재에 불복종하고 떠날 수 있겠지요.
마을과 마을, 부족과 부족이 큰 규모로 모여야 할 때가 있는데, 그 시기에는 위계를 둡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이들이 언제나 자유로운 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왕과 귀족, 군대를 구성합니다. 권력은 엄격하게 작동합니다. 하지만 왕노릇을 잘못하면 다시 소규모로 헤어질 때 무리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에 고정된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기보다 왕의 역할을 하는 배우에 가까워요. 고정된 권력인 아닌 게지요.
영화는 화려하지 않지만 도발적입니다. 인류의 기원이 고정된, 하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전해요. 선사 시대의 사피엔스가 현대의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고등의 사고를 통해 자신의 삶을 신중한 선택으로 채워나가는 존재였음을 그려내지요. 영화를 보면서 자유의 평등이 가져올 미래를 한계없이 상상해보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