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강정을 구하라

세상을 위해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나요?

by 서가지현

몇 해 전 새해 첫 영화로 이병헌 감독의 천만영화 극한직업을 보고, 겨울에 시청률 1퍼센트대였다는 멜로가 체질을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강렬했어요. 영화도 드라마도 재밌었지만, 개인이 한 해동안 오갔을 냉온탕이 어떨까 싶었지요. 그리고 얼마 전부터 포탈에 뜨기 시작한 넷플릭스 드라마 <닭강정>. 포스터 색감부터 심상치 않은데, 들여다보니 배우가 류승룡, 안재홍, 김유정. 감독이 이병헌이랍니다. 아무 후기도 찾아보지 않고, 가족들과 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웹툰 기반 드라마이고, 호불호가 갈려서 1편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던데, 나는 걸리는 거 하나 없이 데굴데굴 구르며 시청했어요.


드라마는 안재홍의 출근길에서 시작합니다. 도착한 곳은 ‘모두기계’. 류승룡, 안재홍, 김남희까지 총 3명의 직원이 있는 회사. 그들은 요란스럽게 아침 인사를 하고, 책상에 앉습니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첫만남처럼. 그들은 또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각자의 컴퓨터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카메라는 한참을 그들을 비춰요. 나는 이 장면이 감독 이병헌이 샤무엘 바케트의 무대를 빌린 거라 확신합니다. 그들이 기다렸던 고도는 점심시간에 온다고 한 걸까요. 점심시간이 되자 살아나는 셋. 감독은 이 장면에서 안부를 묻던 블라드미르의 진심어린 살뜰함, 에스트라공의 쓸쓸하고 처연한 그래서 등을 내주고 싶어지는 인간미를 없앴습니다. 이후 류승룡, 안재홍이 닭강정 김유정을 구하며 쌓아갈 연대의 서사에 양보하기 위해서였을 거라 나는 또 확신합니다.


세상을 위해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쓸쓸하고 처연한 인생이지만 우정과 환대로 살뜰하게 채울 가능성에 반짝이는 관계, 공간, 일. 이를 만들어갈 에너지가 있는 나. 판타지일 수도 있다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그것. 안재홍과 류승룡이 닭강정이 되어버린 김유정을 구하는 과정에서 생긴 그것. 지금, 여기에 머물 것인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고, 세상을 위해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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