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치인에게 훨씬 더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 문화. 달라질 수 있을까
<이 글은 2번에 걸쳐 각기 다른 날 쓰여졌습니다>
Part 1. 2020.10. 9일 미부통령 후보 토론을 보고. (아래 글은 ㅍㅍㅅㅅ 에도 실렸습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 카멀라 해리스는 표정이 풍부하다. 토론을 보니 이렇게 표정이 풍부한 건 정치에서 불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펜스 부통령이 트럼프와 똑같이 거짓말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하는 것을 보며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짓는데, 이걸 보고 "표정은 숨길 수 없다" "잘난체한다 smug"이라는 식의 트위터 반응이 넘쳐났다.
반면 펜스는 시종일관 표정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걸 본 평가는 주로 "대통령답다 presidential"하다는 반응. (트럼프랑 너무 극적으로 차이가 나는, 상대평가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는 내용을 보면 '차분한 트럼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표정이 풍부한 건 사실 공감능력이 풍부한 것일 수도 있다.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지만. 바이든과 해리스가 토론회에서 상대방을 보지 않고, 카메라를 직접적으로 보고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듯한 순간이 잘 먹힌 것도 바로 그런 효과를 노린 거다.
그런데 똑같이 표정이 풍부해도 남녀 정치인은 다른 평가를 받는다. 표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해리스가 토론 내내 끼어드는 펜스에게 활짝 미소를 지으며 "제가 얘기하고 있어서요 (I'm speaking)."이라고 한 건, 아마 나름 리허설한 것으로 보인다. 펜스를 압도해야 하지만 압도하는 듯한 이미지는 주지 않아야 하기 떄문이다.
실제로 남녀 유권자들의 반응에도 차이가 있다. 부통령 후보 토론 후 "누가 이겼나" 설문조사를 했는데 남성 유권자들은 해리스 48%/ 펜스 46%, 여성들은 해리스 69% 펜스 38%로 답했다. 즉 똑같은 토론을 봤는데도 남자들이 해리스에 대해 평가가 박했던 거다.
해리스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 별로였나 생각을 해보니 나조차도 '당당하고, 취조하는 말투이며, 표정이 풍부하고, 똑 부러지는' 여성 정치인이 같은 성격의 남성 정치인에 비해 호감도가 떨어졌던 것 같다. 정치인은 어필하는 능력이 중요한데 똑똑하고 말 잘하고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 정치인은 인기가 없다. 힐러리 클린턴이 딱 그랬었다.
사실 부통령 후보 토론회 전부터 내 머릿속에는 예전 대통령 후보 토론 때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팩트로 계속 공격했던 것, 특히 그 때의 태도가 계속 맴돌았었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젊은 여자가 싸가지가 없다"는 것 때문에 그 다음날 보수언론으로부터 뭇매 맞았던.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인데, 지금 우리 정치를 보더라도 썩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특히 여성정치인들은 옷을 뭘 입고, 표정이 어떻고, 말투가 어떻고... 이런 게 더 많이 평가받는다. (2020년에도 그런 사례가 1톤 트럭으로 퍼주고도 넘친다!) 여성을 컨텐츠로 평가하지 않고 겉모습으로 평가하는 거다.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카말라 해리스는 검사 출신이라서 취조를 잘하는데 이런 이미지를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잔소리하는 엄마, 깐깐한 교장 선생"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씌워 개그 소재로 삼는다.
물론, 대선토론은 겉모습이 거의 전부다. 소위 '사운드바이트 soundbite'라고 불리우는, 한두줄의 펀치라인이나 비주얼에 큰 영향을 받는다. 케네디와 맞붙었던 닉슨이 땀을 흘리는 모습이나, 레이건이 상대방 후보가 "나이가 많다"며 공격하자 "상대방의 경험 부족을 나는 지적하지 않겠다"는 펀치라인. 클린턴과 토론에 나선 조지 부시가 시계를 보며 뭔가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는 모습 같은게 수십년이 지나도 대선토론 시즌이 되면 뉴스 분석에서 나온다. 표정이나 말투가 컨텐츠보다 더 주목받은 건 오래 되었지만, 이젠 '우쥬입닥쳐주시겠음? (Would you shut up man)' 밈(meme)이 바이든이 이야기한 정책 컨텐츠보다 더 기억에 남게 되는 소셜 미디어의 시대다.
그래서 정말 대통령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해리스는 당분간은 '포커페이스' 하는 법을 배워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그렇게 된다면 표정과 감정, 공감능력 풍부한 그의 원래 모습 그대로, 여성 대통령이 아니라 그냥 '대통령'으로 평가받기를 바란다.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의 기회가, 여성이 직접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에게 물려받게 되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어쩌면 시대를 바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타계한 '페미니스트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을 보자. RBG는 하버드 법대 시절 학장이 "남자대신 이 자리에 있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란 질문에 "이 학교에 다니는 남편의 일을 더 잘 이해하려고"라고 답했던 "조신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시대의 물결을 탔고, 시대를 바꾸었다.
Part 2 2020. 11. 8 바이든 당선 이후 해리스의 흰 정장 연설을 보고
과연 해리스는 어떤 부통령이 될까. 얼마 전 산 '노터리어스 RBG'에서 #루스베이더긴즈버그 처럼 사는 법이라는 귀절을 꺼내 보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이라는 페미니스트 대법관인 RBG는 반대파와도 치열하게 하지만 조곤조곤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인권을 진전시켰다. 분열을 화합과 협조로 바꾸는 리더십을 만들어야 할 때 금과옥조 같은 말이다. 미국에서만 필요한 말은 아닐 것이다.
RBG는 극보수인 스칼리아 대법관과 공식 석상에서는 치열하게 토론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함께 오페라를 보러갈 정도로 친했다. 대법관이 되기 전 '아내와 사별한 후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려는 남편'을 대리하여 대법원에서 판결을 얻어냈다. 남자도 집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이 다르지 않음을 역설한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의 언어와 논리'를 장착하여, 결국 여성/유색인종 인권에 꾸준히 기여한 인물이 바로 RBG다.
“신념을 위해 일하라”
무관심 이기주의 불안은 극복하기 어렵지만 소외된 이들의 삶에서 갈라진 틈을 찾아 메우라
“골라가며 싸워라”
분노는 에너지만 갉아먹을 뿐. 중차대한 문제가 걸려 있거니 최선을 다한 뒤라면 분노를 공공연하게 표출 말아야.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여성들이여.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싸워라. 그러나 타인이 내편에 서게 하는 방식으로 싸워라.
해리스가 흰 정장을 입고 나왔을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방식이 생각났다.
여성운동을 상징하는 흰 색 정장. 1900년대 여성 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해 여성들이 시위에 나섰다. 소위 Suffrage movement라고 불리우는 이 운동에서, 여성들은 너무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 위아래로 흰 정장을 입었다. 남성들에 지나치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통은, 2019년 트럼프의 국정연설 때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집단으로 흰 정장을 입고 나오면서 다시 한번 조명되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당시 트럼프의 연설 내용에 항의하는 의미로 연설이 끝난 후 연설 내용이 적힌 종이를 찢었다)
카멀라 해리스는 바로 이런 여성운동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을 연설에서 명확히 했다. "민주주의는 행동하는 것이지 머물러 있는 상태(state)"가 아니라는 존 루이스 흑인인권운동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앞선 운동가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안다 (I know I stand on their shoulders.)"라고 이야기한다. 1900년 초의 여성운동을 비롯,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의 지난한 노력 끝에 결국 미국 최초의 여성/유색인종 부통령 당선인이 탄생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아마 해리스는 첫 여성 부통령으로서 RBG의 점진적 개혁 방식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여자가 어디서' '(속으로) 흑인이 어디서'라는 사고방식의 사람이 많다. 2016년과 2020년의 미국 대선이 잘 보여주지 않았는가.
이 정장을 입고, 이런 연설을 하는 카멀라 해리스를 보며, 그를 지켜보는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표본(representation)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도 벌써, 역사는 한 단계 진전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해리스의 흰 정장이, 분열된 미국을 통합해야 하는 바이든 정부의 작동 방식과 그 결과물을 동시에 상징한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