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나 주제의 전형성을 넘어 보편성을 끌어냈다
어떤 예술작품이든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작품은,
전형적인 상황에 충실해 그 상황에 푹 빠지거나,
그 전형성을 넘어서 보편성을 끌어낸다.
그런데 진짜 고수는 후자다.
영화 <헌트>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후자다.
1983년을 배경으로 했는데 그 시대를 다룬 영화의 전형성에서 약간 비껴나 있으며 무엇보다 교조적이지 않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한 지금까지의 영화나 예술작품에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었다. 역사를 반드시 올바로 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이 영화에는 그런 강박관념이 없다(또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전의 다른 영화들이 교조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헌트>의 역사적 판단은 매우 심플하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포함한 그 시대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내려졌으니 굳이 이 내용을 누구에게 가르치거나 주입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깔끔한 전제에서 시작한 거다.
그렇다고 고증이나 메시지 전달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다. 이정재 감독(정말 대단하다!)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영화에서 고문 장면들을 꽤 잔혹하게 재현한 이유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잔인했다"는 점을 상기하기 위함이었단다.
내가 생각한 유일한 영화의 단점은 진짜 긴장을 풀 여지가 없이 내내 몰아붙인다는 거였다. 액션이나 첩보물들이 중간중간 유머나 로맨스 같은 요소를 넣어서 잠시 완급조절을 하는데 <헌트>는 그런 게 거의 없다.
어쩌면 그렇게 사정 없이 몰아치는 폭력이 언뜻 (겉으로 보기에) 풍요하지만 사실은 잔인한 이 시대의 진면목이었음을 영화가 보여 주는 거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제거하라는 게 주제고, 그 세력 중 하나가 대한민국의 주적이란 설정인데도, 그런 '이념의 전형성'을 훅 뛰어넘어 마지막 장면에서는 정의라는 보편적인 가치에 공감하게 만든다. (스포할까봐 더 쓰지 못해서 근질근질.)
진짜 감탄하면서 봤던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이정재와 정우성이 서로 매직 미러를 사이에 두고 흡사 쌍둥이가 된 것처럼 마주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하지만 사실은 같은 곳을 봄'을 영화 곳곳에서 비주얼적으로 드러낸다. 방콕 테러현장에서 둘이 은밀히 나누는 대화 장면도 마찬가지.
8월 18일 16부가 종영된 우영우.
사실 처음에는 장애나 자폐에 대한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장애에 대한 고증도 상당히 철저히 되어 있다. 그런데 16화까지 보니, 장애가 주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관계 프리즘과 다양한 인간 스펙트럼이란 보편성을 보여준다.
극 초반에는 주인공 우영우를 통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특성을 많이 설명했다. 떄로는 영우의 입을 통해서, 법정에 나온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극 중반이 되자 자폐인을 대하는 비장애인들의 태도, 이에 대한 자폐인의 리액션, 자폐인을 둘러싸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관한 비장애인들끼리의 갈등 구조 등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여전히 '장애와 그 주변'의 충돌 또는 타협 또는 갈등이 주제였다. 지적장애인의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적장애인을 준강간한 것으로 기소된 남성을 변호하게 된 영우의 내적 갈등이 나온 에피소드가 정점이었다.
보통 미디어에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나오는 장애 이야기는 딱 여기까지 나온다. 장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나오는 현실, 이에 대한 액션, 그리고 리액션. 끝.
그런데 드라마 <우영우>에선 여기에 액션/리액션이 한두 단계 더 추가된다. 현실엔 없을 것 같은 관계라곤 하지만, 영우를 사랑하는 이준호(사진)의 변해가는 반응이 대표적이다.
영우를 마냥 챙겨주다가 영우로부터 일방적 이별 통보에 현타가 오는 이준호의 모습은 장애인/비장애인 관계의 민낯이다. 현타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준호는 처음엔 섭섭해하고 나중엔 화내고, 마지막회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한다.
준호가 영우와의 관계를 고양이와 집사의 관계에 빗대서 '고양이가 집사를 외롭게 만들어도 집사는 고양이를 사랑한다'고 말한 건 사실 살짝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보살피는 동물에 장애인을 빗댄 것이니. 단, 개-인간과의 관계와는 달리 실제로 많은 이들이 고양이를 '상전'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또 이해가 되기도 한다.
<우영우>의 중심은 법정 드라마다. 법정 드라마라고 하면 정의구현 이야기가 주를 이뤄야 할것 같지만, 영업도 해야 하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 없는 사건 수임도 해야 하며 법기술자로 자신의 신념을 가끔은 외면해야 하는 로펌 변호사들의 모습이 그냥 인간사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영우>의 로맨스와 유머는 <헌트>의 건조함과 아이러니하게도 동일한 역할을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로맨스도 유머도 법정 드라마의 양념이 아니다. 장애든 비장애든 사람들끼리 액션. 리액션. 서로 부딪히다가 성숙하고 발전해가는 말 그대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캐릭터를 축하(celebrate)하는게 이 드라마에서 로맨스와 유머의 역할이다.
영우를 질투하고 괴롭히다가 나중엔 영우를 돕게 되는 권민우 변호사 캐릭터도 이런 다양성 측면에서 비춰진다.
이 캐릭터는 분노가 가득해 보이는 실제 우리 주변의 20대 남성들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공정 따지고, 박탈감을 느끼고, 약자가 사실은 약자 아니라며 핏대 올리지만, 알고 보면 그럴만한 이유도 있고, '따뜻한 봄날의 햇살에 마침내 옷을 벗는 나그네'일 수 있으니 '악플이나 다는 나쁜 놈'으로 몰아붙일 이유가 없다. 만나서 액션 리액션 하다 보면 이해도 되고 설득도 된다. 인간에 대한 낙관으로도 읽힌다.
권민우나 나나 뭐 그리 차이가 있을까. 장애아를 키우며 내 안의 나쁜 면도 강한 면도 확인하게 된다. 장애아 부모라고 차별을 안하는 게 아니다. 배워 가는 거다. 이런 경험을 주변에 나누다 보면 처음엔 무심하게 미세차별 발언을 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아, 이건 부적절하구나'란 걸 알게 된다. 액션, 리액션, 액션, 리액션. 배울 수 있어서, 변할 수 있어서 인간이 위대하다는 걸 장애아 양육으로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장애가 '다양성''스펙트럼'임을 알게 되고 존중하게 된다. 장애 뿐 아니라 여러 다른 이들의 다양성도 존중하게 된다.
<우영우>는 결국 장애가 아닌 인간과 다양성에 대한 보편적인 드라마란 생각이 든다.
PS. <우영우> 마지막 15~16화를 보면서 작가분이 진짜 공부 많이 하셨다는 생각을 했다. 해킹 사건 말이다. 엄청나게 유명한 두세 건의 해킹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디테일 중에 몇 가지는 실제 그 사건에서 따왔다. 하지만 당연히 10년 사이 법도 엄청나게 바뀌었고, 사건 해결의 뼈대 또한 완전히 다르다. 암튼 두 화를 보면서 소름돋고 예전에 이 사건 대응하던 트라우마 살아나는 줄.
PS2. 보편성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놈의 보편성 설득력을 위해 잘생기고 멋진 수트빨 청담부부의 몸싸움이라던지, 굴러가면 소리가 날 것 같은 큰 눈망울을 굴리는 박은빈의 장애 연기가 필요했다는 게 여전히 입맛이 쓰다. 에잇 더러븐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