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사랑의 이해, 이승우 작가, 테드 창
오늘 아침에 이승우 소설가(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다는 평가를 듣는)의 예전 인터뷰를 우연히 보다가 이런 부분을 봤다.
"프랑스 문학전공자가 '이승우 문장은 번역할 때 손실되는 게 없다'고 한다... 번역에서 문장과 어휘가 버려지면 정서-역사-세태를 전달하는 표현이 많이 손실된다. 그런데 내 문장은 비교적 그런 게 없다. 한국어가 가진 감성적 부분이 덜해서 번역하기 용이하다고. 반대로 보면 한국적 정서에서 먼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뉴스앤조이 인터뷰 중)
전세계 최초로 최단기간 1억명 사용자를 넘어선 챗GPT. '요약은 유려하게 잘하는데 팩트를 찾으려 할 때는 거짓말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원리를 세계적인 SF소설가 테드 창은 GPT를 '흐릿한(blurry) JPEG 이미지'에 비유했다. (미디어오늘 이정환 대표님이 페이스북 글로 공유해주신 테드 창의 <The New Yorker>기고문 제목이다) 언뜻 보기엔 멀쩡해보이지만 확대해 보면 픽셀이 깨져 보이는 JPEG이미지라는 것이다. 미드저니나 달리 같은 AI로 생성한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려 놔도 손가락이 6개라던지 하는 오류를 피하지 못한다.
이 두 기사를 읽으며 예전 통번역을 배울 때 생각이 났다.
통번역에서는 시간상 요약하는 일이 있더라도 가급적 의역하지 말라고 배운다. 그 어떤 경우에도 화자의 말을 왜곡하거나 통역자의 말을 붙여서는 안된다. 통역사의 역할은 통역이다. 이 원칙을 명심하기 위해 기존 통역사들 중 '유창성은 높은데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통역과 원문을 비교하여 일부러 들어보기도 했다.
좋은 통역을 하려면 물론 통역사의 능력이 중요하다. 통역사는 최대한 튀어선 안된다. 화자의 표현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게 1차 목표다. 그래서 4자성어나 유머처럼 압축적 문화 배경이 필요한 표현이 통역할 때 가장 곤란하다. 분위기를 전달하려면 의역이 불가피한데 (설명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통역사의 역할은 설명이 아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유창하게 의역하며 원문 리액션을 이끌어내는 건 통역사의 지력도 필요하지만 재치와 눈치가 필요하다.
좋은 통역이 되려면 통역사의 재치, 눈치 외에도 3가지 요소가 더 필요하다.
1) 예측 가능하게, 명료하게 말하는 화자
: 한국어를 동시통역할 때 많이 겪는 일인데 주어에서는 A라고 말할 것 같이 하다가 서술어에서 'A 아님'이 되는 경우도 있어서 통역사가 정정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화자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리가 안되면 통역도 어렵다.
2) 물리적으로 통역이 잘 들리게 하는 환경
: 마이크나 스피커, 통역기에 문제가 있으면 당연히 전달이 떨어진다.
3) 통역사에게 의존하지 않는 청중
: 흔히 가면 통역에 100% 의존하거나 통역사의 유창성을 크리틱하는 청중이 있다. 청중의 반응만이 통역사의 유일한 인센티브라고 가정해본다면 통역사는 유창성만 높이려고 할 수도 있다. 오히려 통역사에게서 '오역이나 의역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중이 통역사에게 더 좋은 청중이다. '유머나 4자성어'까지 완벽하게 통역사가 다 전달할 것이라고 청중이 생각하기보다 통역은 통역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팩트체크도 되고 "원어민들은 왜 저기서 웃었지?"라며 찾아보기도 한다. 물론 그래야 통역사도 발전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챗GPT를 보며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 적당한 유창성(때로는 뻔뻔하기까지 한) 때문이다. 그러나 GPT든 바드(구글이 지난주 챗GPT의 대항마로 발표했다가 팩트체크를 잘못해서 알파벳 주가를 10% 가까이 떨어뜨린)가 되었든 그로 인해 인간의 직업이 줄어들지언정 인간 고유의 영역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해 본다.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성'과 '계속 의심하는 능력'은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통역 상황과 비슷하다. '화자'는 완벽하지 않고, 모든 통역 환경이 완벽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농담을 통역할 때 문화적 맥락에 재치와 눈치, 그 상황에서의 분위기를 종합한 해석은 수백 가지다. 답변을 유창하게 지어내는 게 목표인 챗GPT가 내놓는 답변들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
다만 챗GPT와 AI개발 경쟁에 우려되는 부분은 있다. 과거 학습데이터에 기반한 AI가 창조적 컨텐츠까지 만들어내다 보니 아트나 연구 영역에서도 모두가 다 아는 역사적 레퍼런스나, 기존 (문화)컨텐츠나 이미 영향이 큰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더 커지는게 당연해진다. 앞으로 최소한 몇 년 동안 창조적 영역이나 연구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관론이 팽배할 수 있다. '(피카소 수준이 되지 못할 바에야) 아예 그림은 시작조차 하지 말자' '(챗GPT 수준의 글을 쓰지 못할 바에야) 생각할 필요가 아예 없어지는 것 아냐'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컨텐츠나 연구 결과물을 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그렇다면 필요없는 것일까? 매끈하게 다듬어졌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뭉뚱그려진 '기존 기준대로 평가하면 완벽한' AI컨텐츠에 지레 겁먹는 건 당연한 건가?
이승우 작가는 아버지를 어린 시절 여의고 자신도 느끼지 못한 아버지의 부재를 종교에서 찾았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겉돌고 소설을 쓰게 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쓴다. '나 아닌 타자'의 개념을 탐구하는 <이국에서>와 같은 소설을, 생성AI가 언젠가는 유려하게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생성AI에게는 이승우의 자아가 없다.
생성AI가 민감한 외교회담에서 농담마저 살벌하게 하는 분위기까지 전달할 수 있을까? 얼굴 표정과 손의 제스처의 격렬함까지 메시지의 일부로 간주하는 인간 수어통역을 AI가 완벽하게 대체하기 어려운 이유다.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서 서브여주 미경은 왜 남주 상수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나는 그런 다정함을 지능으로 보거든. 상대를 안심시키는 반듯함 같은거. 그런 건 하루 이틀에 쌓이는 게 아니니까. 그 사람은 '상수'같아서 좋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변수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도 일정값을 유지해서"라고 한다. (전체 짤은 여기)
그러나 미경은 결국 상수와 이어지지 못한다. 상수는 AI가 아닌 인간이다. 그의 행동은 대부분 '상수'같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변수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상수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상대방의 마음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여주 수영을 좋아한다)
AI가 지능의 영역인 다정함을 쌓을 수도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해 AI가 막말을 안하는 건 학습 효과가 아니라 삭제 효과다. 케냐 외주센터에서 학습데이터에 깃든 혐오나 폭력성을 제거했다. - 학습과정에서 불거지는 도덕성은 또 다른 이슈지만)
AI가 상수의 영역에서 유창성을 넓혀 가더라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 특유의 변수 -- 자신이 가진 고유한 인생 여정, 경험을 포함해-- 자체가 강점이 될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연구를 할 수 있고. 결국 피카소나 이승우처럼 AI가 참고하는 레퍼런스는 '불완전하지만 창의적이며 노력하는' 인간에게 AI의 미래도 달려 있다고 믿는다. 이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닐까. 많은 전문가들이 '검색 방식의 변화로 교육이 바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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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몫이 남아 있고, 통역할 만한 컨텐츠를 가진 화자가 되는 것도 인간의 몫이며, 통역이 잘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인간의 몫이다. 통역 결과를 듣고 유창성과 내용, 뉘앙스를 지적하면서 결국 더 양질의 소통으로 이어지게 하는 '청중'도 인간의 몫이다.
P.S. 1)
장애는 이런 측면에서 AI시대에 '아직 레퍼런스가 부족한 학습 데이터'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법도, 연구도, 창의적 컨텐츠도. 다 너무 부족하다. 즉, 구글, MS, 메타, 네이버, 카카오 같은 빅테크/대기업들이 장애 오리지널 컨텐츠를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생산성과 관계없이) 지원하는 건 AI시대에도 경쟁력이 된다고 믿는다.
P.S. 2)
새벽에 영감받아 아침에 내가 원하는 주제의 글을 써제끼던 때가 있었다. 쓰다 보면 내가 관심있는 장애, 미국정치, 기술의 미래, 민주주의, 인간의 취약성 같은 주제들이 마구 뒤엉키곤 한다. 정리하기 버거워서, 최근엔 에너지가 너무 떨어져서 글을 못쓰기도 하지만 가끔씩 오늘처럼 간신히 엮어내기도 한다. GPT가 이런 글을 쓰진 못할 거라고 스스로 자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