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손주들만의 '다정한 세계'에 대하여
추수감사절을 이틀 앞두고 초등 2학년인 작은 아이의 국어(English Language Art) 시간 과제는 ‘내가 감사하는 것(What I am thankful for)'에 대해 작문하기였다. 엄마, 아빠, 형, 그리고 요즘 푹 빠져 있는 야구 다음으로 아이는 “할머니!” 하고 외쳤다. 할머니한테 왜 고마워? 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당연한 걸 모르냐는 투로 두 눈이 동그래지더니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해주고, 맛있는 걸 엄청 많이 해주잖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확신에 찬 것이어서 감격했다. 아이에겐 외할머니, 내겐 엄마가 이제 갓 7년 된 아이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서울에서 내가 회사 다니는 동안 그 빈자리를 할머니가 꽉 채워줬구나, 하는 안도감도 함께 찾아왔다. 아이는 Grandma 칸에 ’love me‘, 그리고 ’yummy food‘라고 썼다. 할머니가 해준 것 중에 뭐가 제일 맛있어? 아이는 미역국과 멸치볶음을 꼽았다.
밤 10시 넘어 회사 탕비실에 커피를 내리러 가면, 그곳과 바로 붙어 있는 회의실에서 어린이집 교사 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오곤 했다. 다른 부서 후배였다. 아이 둘을 둔 후배는 아이들이 입주 육아도우미와 잠들기 전에 잠깐 놀아주는 중이었다. 하이 톤으로 “○○야, 엄마 어딨게요? 잡아봐라~” 하는 후배 목소리 다음으로 까르르 웃는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문 밖을 나서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는 후배는 무심한 무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이들을 어르는 명랑한 엄마의 모습은 싹 사라졌다. 조용하고 빠른 속도로 노트북 타자를 치는 후배의 뒷모습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세상 거칠 것 없는 자신만만한 싱글 여성이었던 그녀가, 정신없이 야근하는 와중에도 잠깐 짬을 내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엄마가 되다니. 그 후배가 그 누구보다도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후배처럼 일과 육아라는 두 개의 공을 제때 적절하게 저글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다가 문득 시계를 보고 밤 10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깜짝 놀라 조용히 사무실 복도로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잠깐 보고 나온 아이들이 이제 잠들었는지, 엄마를 찾으며 보채진 않았는지 걱정하면서. 그러면 엄마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애들 잔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운 아이들이 깰까봐, 엄마 목소리에 칭얼댈까봐 통화 차단. 딸이 언제 퇴근하는지, 그래서 자신이 언제 쉴 수 있는지 묻지 않으셨다. 엄마는 “애들 재우는 밤 10시 무렵에 집에 도착하면, 밖에 30분쯤 있다가 들어오라”고 했다. 회사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어 "집에 언제 오냐"고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얼마나 고맙고 미안하길 바라시길래 이렇게 손주들을 도맡아주시나, 아득해지곤 했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야근이 잦은 회사에 오래 다닐 수 없었을 거다. 도우미 아주머니 등을 고용해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버틴다 해도 밤 시간은 어쩔 수가 없어서 좋은 직장을 포기한 친구들이 적지 않다. 야근하는 삶을 견디고 있는 우리 회사의 ‘엄마 동지’들이 있지만, 각자의 십자가를 힘겹게 지고 있다. 시어머니가 애들 목욕까지는 못해주겠다 하시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명절 보너스를 과하게 바라고….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육아 구멍’이 가장 큰 고비였다. 중국인 이모가 본국으로 가버려서, 시부모님이나 친정부모님이 입원하게 돼서…. 이번 코로나 대유행 때 유치원이 문을 닫아 아이 돌봄에 양가 부모님에 더해 대학생 조카까지 동원했다며, 어느 동료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엄마는 12년간 성실한 육아 근로자였다. 딱 한 번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막내 동생이 사는 이탈리아로 2주간 여행을 갔을 때 유일하게 ‘장기 휴가’를 내셨다. 엄마의 친구 분들은 주말 나들이를 계획하면서 “이번 일요일에 지남이 출근하니?”를 먼저 물었다. 내가 출근하면 엄마가 나들이 모임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친정엄마의 전폭적 지원을 누리는 나를 동료들은 부러워했다. 나도 이것이 흔치 않은 행운임을 잘 알았다. 우리 집에서 나는 남편이고 엄마는 아내고 남편은 하숙생 같다고 농담하곤 했다.
엄마의 희생은 대체로 행운으로 다가왔지만, 때로는 죄책감을 안겨줬다. 친정과 도보로 10분 거리에 살 때 차를 몰고 한밤에 퇴근하면 집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든 아이들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 엄마를 차로 모셔다 드렸다. 그 짧은 시간에 엄마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오늘 아이들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하셨다. 준이가 유치원에서 과자 만들어 왔는데 엄마 먹으라고 식탁에 남겨 놨다, 은수가 놀이터에서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다 등등. 그리고 조수석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엄마는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짧고 묵직한 신음에 하루의 고단이 묻어났다. 회사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막상 통장에 들어온 급여가 넉넉하지 않음을 깨달은 날이면 나라를 구하는 것도, 엄청난 출세를 하는 것도,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면서 ‘엄마를 조금씩 잡아먹는’ 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게 맞는 것인지 회한이 들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할머니도 조금은 편해졌다. ‘다라이’에 물을 받아 물놀이까지 시켜줘야 목욕을 마치던 아이들이 이제는 둘이서 씻고, 생선구이 같은 좋아하는 반찬을 해주면 스스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자라났다. “할머니는 내가 정말 자랑스럽대” 큰아이는 뿌듯하게 말하곤 한다. 개구쟁이여서 할머니에게 자주 혼이 나서 “할머니 미워”를 자주 외치던 작은아이도 할머니를 늘 자신 곁에 있는 든든한 존재로 여긴다.
“할머니한테는 오래된 꽃 냄새가 나.”
얼마 전에 큰아이가 말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할머니 집에서 할머니 품에 안겨 TV를 보다가, 할머니가 해준 밥을 먹고, 할머니네 자기 방에서 할머니가 깎아준 사과와 배를 먹으며 만화책 보는 거라는 아이. 아마도 할머니의 냄새는 노인의 체취와 저렴한 비누향이 섞인 것이겠지만, 아이에게만큼은 오래된 꽃 냄새다.
회사 다니는 딸이 엄마에게 선물한 건 돈도 출세도 명예도 아닌, 할머니와 손주들이 자신들끼리만 구축한 다정한 세계였다. 놀이터에서 뛰어놀 때 얼음물과 땀 닦을 손수건을 들고 벤치에 앉아 기다려주고, 김치를 먹기 좋게 손으로 잘게 찢어 숟가락에 얹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은 할머니 김밥이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꼭 과일을 깎아 나눠먹는 다정한 세계. 이것이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여기저기가 낡고 아프게 된 엄마에게 절반의 보상이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