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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nam Kang Feb 11. 2021

퇴사 후에도 퇴근합니다

퇴근이 '오늘을 잘 살아냈다'는 증거라면

뉴욕에 와서 사귄 친구 J의 가족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먹었다.

 

우리 식구 넷, J네 식구 셋, 이렇게 7명이 식사를 마친 식탁을 정리하고 디저트를 차리려는데, J가 굳이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며 나섰다. 손님이 이러시는 게 어딨어요, 놔두세요, 저희가 나중에 할게요, 하고 거듭 말려도 J를 막을 수 없었다. “저 설거지 너무 좋아해서 남편도 못 하게 하거든요.” J의 남편은 “그 말 맞다”며 웃었다. 기어코 설거지를 도맡아 끝낸 J는 행주로 개수대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언니, 전 이렇게 개수대 닦을 때 기분이 좋아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랄까!”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결혼해 퇴사하고 아이를 낳아 키워온 J는 내게 전업주부 선배다. 퇴사를 하고 나면 퇴근하는 보람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 J는 전업주부에게도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과 하루를 마무리하고 난 뒤의 ‘시간’이 있음을 알려줬다.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식구들에게 차려준 저녁상을 치우고 이런저런 살림을 끝낸 뒤 소파에 누워 좋아하는 드라마를 시청하며 까무룩 잠이 드는. 엄마도 퇴근 후 달콤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저 막장 드라마의 열혈 팬이 아니라.


여비서가 되는 법


고등학생 때 이상한 수련회에 갔었다.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으로 매해 수학여행을 남녀 구분 없이 전교생이 다함께 갔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자 교장선생님이 새로 오시면서 남학생은 경주로, 여학생은 송파구 장지동에 위치한 어떤 수련시설로 나눠 보내졌다. 그 시설에 도착하자마자 여학생들은 과자며 초콜릿 같은 간식거리를 압수당했다. 그리고 2박3일간 미래의 가정주부로, 여비서로서 갖춰야 할 ‘스킬’을 배웠다. 쌀 앉히는 법과 설거지하는 법, 사과 깎는 법, 빨래하는 법, 한복 고름 매는 법, 커피를 타서 손님에게 내는 법 등등. 심지어 커피를 테이블에 소리나지 않게 올려놓은 뒤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것을 한 명씩 실습했다.

 

아침 7시 기상해 밤 9시 취침할 때까지 자유시간이라고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불에 누운 채 수다를 떨었지만 노곤한 하루를 보낸 탓에 금세 잠들어버렸다. 여학생들은 선생님의 지시 및 감독 하에 하루 세끼를 직접 만들어 먹고 치웠다. 식재료를 받으러 중앙 본부(?)에 다녀오는 길에 건물 벽면에 써붙인 연혁을 보고 이 시설이 전두환 시절에 이순자 여사가 주축이 돼 만든 곳임을 알게 됐다.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각자 이름표에 스스로 별명을 지어 적으라고 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별명으로 표현하라고 했다. 나는 ‘열심이’라고 적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살아서 자립하리라. 삼시세끼 밥하고 가족 뒤치다꺼리만 하는 가정주부가 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아니, 결혼따윈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모욕적인 2박 3일을 보낸 뒤 퇴소하면서 우리는 간식거리를 되돌려 받았다. 시설 밖 담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콜라와 과자를 까먹었다. 우리는 이런 시설은 미친 곳이며, 이런 데 우리를 집어넣은 교장선생님도 미친 거 아니냐며 한바탕 욕을 했다. 남자애들은 경주 가서 여학교 애들이랑 미팅했겠지? 하며 질투도 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나로 살리라. 누군가의 누군가가 되지 않으리라.

 

퇴사는 이런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는 물론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독립된 사람이 돼야 한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벌이’가 꼭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스스로 그만두고 가정주부가 되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퇴근은 오늘 하루도 내가 그려왔던 나로 살았다는 증거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퇴사를 고민하면서 남편에게 반복해서 했던 말 중 하나가 “나 이제 당신한테 빈대 붙어도 돼?”였다. 그런 내게 남편은 “당신은 남편에게 의지하는 것에 대해 포비아가 있는 것 같다”며 의아해했다.  

 

어쨌든 퇴사를 했다. 그리고 퇴근할 기회가 영영 사라졌다고 여겼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별 다를 바 없는 집안 생활이라 여기며 불과 얼마 전이었던 퇴근 있던 삶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는 ‘그립다’ 생각했는데, 이제 와 다시 곱씹어보면 관성의 잔재였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퇴근이 나 스스로 정의한 대로 ‘오늘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증거’라면, 그건 꼭 회사를 다녀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육아와 살림은 그 나름대로 다양했고, 변화무쌍했고, 나름의 보람과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퇴근하기 전에 책상을 정리정돈하는 것(회사 다니는 동안 나의 루틴이었다)과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행주로 개수대를 말끔히 닦아내는 것은 그리 다른 행위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자본주의 사회로 



그리고 책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만났다. 친구와 신문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저자 정아은은 ‘엄마들은 왜 온종일 가사를 하고도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는가?’라고 물으며 ‘돈 얘기를 해야 한다, 모든 일의 핵심에는 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며 포문을 연다.

 

직장을 놔버리고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나는 왜 주저했을까? 집안 경제의 중요 기둥이던 내 수입이 끊기는 것과 독립적 소득 없이 남편의 소득에 기대 살아야 하는 것이 퇴사를 어렵게 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것들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추가적인 이유를 정아은의 책에서 확인했다. 우리 엄마를 비롯해 내가 보아온 전업주부들은 가정에 들인 노동과 노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나도 그런 처지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정아은의 표현에 따르자면 직장이 노동에 대가를 지불하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가정은 사랑과 헌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비자본주의 사회’다. 두 사회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전자를 고르는 축에 속했다. ‘돈을 버는 나’는 존중 받았고, 가정이 필요로 하는 각종 무보수 노동에서 마땅히 제외되는 혜택을 누렸다.

 

내가 속한 세상, 그러니까 전업주부들의 세상은 (중략) 어떻게 보면 중세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돈이 아닌 관계가 중심이 되는 곳, 물질보다 정신이 중요시되는 곳, 그렇기에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 그것이 갓 회사를 박차고 나온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였고, 동시에 그런 세상에 몸담으면서 한편으로 편안함 혹은 뭉클함 같은 걸 느끼게 되는 이유였다. (중략) 자본이 점거한 세상에서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세상, ‘사랑’과 ‘헌신’의 이름으로 꾸며져 있지만 화려한 치장을 들추면 소외감과 황량함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영혼들이 숨 가쁘게 일상을 이어가는 외딴섬이었다. – 정아은,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1장 ‘주부들이 사는 외딴섬’ 중에서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겪어온 것이라면 그 다음은 부끄럽게도 깨닫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정아은은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실비아 페데리치의 ‘혁명의 영점’ 등의 책을 통해 자본주의가 애써 외면한 돌봄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교에서 배운 자본주의의 3대 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자본주의의 주요 축, 노동자는 노동을 하고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노동자가 건강한 상태에서 일할 수 있도록 노동자를 돌보는 가정은 ‘자본주의 설계도’의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진짜 놀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설계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가정주부들은 열심히 일하고도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는다. 애초에 잘못된 설계 때문에 우리 사회는 가정주부를 오해하고 부당한 평가(‘남편 덕에 편하게 산다’)를 가하고, 나조차도 거기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었던 거다.

 

이 책(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을 읽은 뒤 나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먹고살지 않느냐”라는 말에 이렇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내가 먹고사는 게 아니다. 내가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고 아이들을 건사해주기 때문에 남편이 마음 편히 나가서 일하고 올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나’라는 비임금노동자가 있기 때문에 남편이 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관계는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다. 다른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이.” –위의 책 3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퇴사하고 반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다. 따박따박 월급으로 치환되지 않는 나의 노동도 인정 받을 가치가 있는 노동임을. 집안에서의 하루치 노동을 끝낸 뒤 퇴근할 권리가 내게도 있음을. 이것을 ‘집에서 논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면, 애초에 오류를 내포한 자본주의 설계도를 설명할 의지가 내게 있음을. 상호 의존하는 관계로서 ‘벌이’의 의무를 배우자 한 쪽이 오로지 져야 하는 것은 아님을. 퇴사하고 두어 달 됐을 무렵 서울의 친구가 줌(Zoom)으로 만나자며 언제 시간이 괜찮냐고 물었을 때 “나는 노니까 아무 때나 괜찮다”고 했었다. 그러자 친구는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낸시 폴브르가 그 무렵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내줬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학교가 문을 닫아 아이를 돌보느라 ‘부모가 일할 수 없다(can’t work)’고 말하지 말라. 대신 ‘부모가 돈을 벌 수 없다(can’t earn money)’고 말하라. 아이를 돌보는 것은 일이다. 부모의 일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간다. 표현이 문제다.” 나부터가 제대로 된 표현을 해야겠다.

 

물론 일에서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보람과 만족감을 얻었다. 그것 역시 퇴사를 망설이게 하는 큰 이유였고, ‘좋은 퇴근’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었다. 이 문제는 감사하게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퇴사 후 두어 달 지난 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의뢰 받았다. 생활은 조금 복잡해졌다. 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하거나 등교했을 때 일하고, 아이의 숙제를 봐줘야 할 때는 일을 접는다. 오후에 일하다 보면 아이들이 간식 달라, 나가 놀자 하고, 어느새 저녁밥을 해야 할 시간이 되고, 그려러면 잠깐 마트에 다녀와야 한다. 아이들 재우고 일하다 나도 까무룩 잠들고, 새벽에 일어나 일하기도 한다. 벌이는 월급 받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졌고 나의 시간은 더욱 파편화됐지만 마음만은 부자다.


The Show Must Go on

 

pixabay


다시 생각한다. 퇴근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증거라면, 그것은 직장을 다니냐 아니냐와는 하등 상관 없는 것이라고. 자본주의가 규정해놓은 ‘일의 세계’의 범주를 더는 수용하지 않겠다고. 이상한 시설을 만든 이순자 여사나 그곳으로 여학생만 보낸 교장선생님은 구시대 유물로 서랍에 넣어놓자고. 결혼과 부모 되기를 선택한 나는 이제 상호 의존하는 가족의 세계의 일원임을 익히자고.

 

그래서 나는 요즘도 출근하고 퇴근한다. 아침 6시, 아이들이 깨기 전 혼자 커피를 내려 마시며 출근 준비를 하고, 아이들에게 밤 9시는 엄마의 퇴근 시간이니 그 이후엔 엄마를 찾지 말라고 말해뒀다. 엄마와의 대화는 가능하지만, 사과 깎아달라거나 핫초코 만들어 달라는 요청은 밤 9시 전이어야 한다는 걸 아이들도 (잘 지키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짬짬이 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매듭 지은 날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산책 나간다. 그리고 되도록 매일을 다르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낯선 식재료를 사서 다뤄보고, 새로운 요리를 해보고, 주변 사람들과 친밀한 교류를 시도한다.

 

어떤 날은 만족스럽고 어떤 날은 후회가 많다. 어떤 날은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또 어떤 날은 시간이 더디다. 회사 생활에 기복이 있듯 가정에서의 일상도 그렇다. 오늘의 퇴근이 개운하지 않은 날엔 내일은 좀더 좋은 퇴근을 만들어보자고 다짐한다. 대학 1학년 때 교양영어 수업에서 ‘The Show Must Go on’이라는 에세이를 배웠다. 아무리 힘겨운 순간에도 삶은 계속돼야 한다는, 당시는 지루하게 여겼던 에세이의 메시지가 요즘 종종 생각난다. 고난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루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내게 달린 일임을, 퇴근은 누가 시켜주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거라는, 그렇게 인생은 하루씩 전진하고 있음을 나는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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