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enam Kang Feb 26. 2021

무지개처럼 살다 간 뉴욕 여자

글로리아 밴더빌트(1924~2019),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뉴욕 그랜드센트럴역 앞과 책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마지막 수업>



책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마지막 수업>을 읽기로 한 것은 ‘밴더빌트(Vanderbilt)’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뉴욕에 와서 밴더빌트란 이름을 자주 접했다. 뉴욕의 기차역인 그랜드센트럴 역에는 밴더빌트 홀이 있고, 그랜드센트럴역 바로 옆에는 밴더빌트 애비뉴가, 또 밴더빌트 애비뉴 초입에는 ‘원 밴더빌트’란 이름의 대형 빌딩이 있다.

 

‘철도왕’ 밴더빌트. ‘석유왕’ 록펠러와 ‘철강왕’ 카네기만큼 거대한 부를 쌓은 뉴욕의 가문. 역사 속 이름이라 여겼는데, 밴더빌트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CNN 저녁 뉴스를 진행하는 앤더슨 쿠퍼의 외가가 밴더빌트 가문이다. 그의 어머니이자 밴더빌트 가문의 상속녀인 글로리아 밴더빌트(1924~2019)는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뉴욕에서 생존했었고, 뉴욕의 자랑이라 할 휘트니미술관을 세운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의 손에서 자랐다. 휘트니미술관에 가면 로버트 헨리가 그린 휘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매일 바지를 입었다는 휘트니답게 녹색 바지 차림으로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모습이다.

 

<떠나는 자와…>는 쿠퍼가 어머니 글로리아와 함께 쓴 책이다. 글로리아가 아흔 한 번째 생일을 맞이한 때부터 모자는 1년간 이메일을 주고 받았고, 쿠퍼는 이를 엮어 2016년 책으로 펴냈다. 국내 번역본도 같은 해 출간됐다.

 

네 번의 결혼, 세 번의 이혼

 


글로리아 밴더빌트는 그랜드센트럴 역을 세우기도 한 철도재벌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의 고손자 레지널드 밴더빌트의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생후 15개월에 아버지를 여의고 400만 달러가 넘는 유산을 상속 받았다. 현재 가치로는 5300만 달러, 약 60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부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진부한 진리는 어린 글로리아의 인생을 관통했다. 18살에 과부가 된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사랑하지도, 보살피지도 않았다. 글로리아는 프랑스 파리의 호텔에서 화려하게 차려입고 파티에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할머니와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외손녀가 8살이 되자 외할머니는 자신의 딸 몰래 외손녀를 고모, 휘트니에게 보낸다. ‘거르 고모’는 글로리아 아버지의 이복 누나다. 하지만 딸의 유산 ‘소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시누이를 상대로 양육권 소송을 제기하면서 10살 무렵의 글로리아는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처지에 놓인다. 소송은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동성애자라는 폭로가 나올 정도로 막장으로 치닫다가(당시 동성애는 감옥에 갈 수도 있는 범죄로 취급됐다) 휘트니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롱아일랜드 밴더빌트 가문의 대저택에 사는 소녀 글로리아는 행복하지 않았다. 법원 판결로 친어머니보다 더 어머니라고 여겼던 유모를 해고해야 했고,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검은 속내를 겪었기 때문이다. 글로리아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 어머니의 초대로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다가 영화배우들과 어울리는 화려한 할리우드 생활에 푹 빠져 거르 고모의 보살핌과 고등학교 졸업을 모두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세 번의 이혼과 네 번의 결혼이 이어졌다. 성급한 결혼 결정으로 첫번째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 불행했다. 세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고, 네번째 남편인 와이어트 쿠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카터와 앤더슨을 낳았다.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됐고 40대에 접어들었으니 이제 긴 방황을 끝내고 안정적인 인생을 이어갔을 법한데, 글로리아는 그러지 못했다. 남편 와이어트가 1978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1988년 셋째아들 카터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부잣집에 태어났다고 해서

 

왠만한 통속소설 못지 않은 화려하면서도 불행이 점철된 인생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존하는 두 사람의 대화임에도 소설을 읽듯 몰입돼 빠르게 읽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별세계’에 속한 글로리아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특히 양육권 소송 때 자신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린 신문에 ‘불쌍한 어린 부자 소녀’라고 적힌 것을 읽었을 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글로리아는 아들 쿠퍼에게 말한다.

 

“불쌍한 어린 부자 소녀”.

나는 내가 ‘불쌍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부자’라고도 느끼지 않았는데 나더러 ‘불쌍한 부자’라니….

나는 ‘불쌍한 어린 부자 소녀’가 되고 싶지 않았어. 이런 바람 때문에 나는 내 인생에 중요한 어떤 것을 이루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단다.

 

글로리아의 불행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는 데서 싹튼다.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된 글로리아는 ‘부모됨’과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누군가의 부모가 되려면 자기 자신을 확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그걸 할 수 없었던 분이셨다”고 설명한다. 네 번의 결혼에 대해서는 메리 고든의 소설을 빌려와 말한다.

 

“아버지가 없는 이 소녀는 오로지 영웅적이고 필사적이고 극단적인 것에서만 만족을 얻는다. 아버지가 없는 소녀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메리 고든의 소설 ‘여자와 함께 있다는 것(The Company of Women)’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이런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쿠퍼는 끊임없이 가구를 새로 들이고 벽지와 카펫을 교체하는 어머니 모습에 조급증을 느끼며 심각한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알코올 중독자가 아닐까 형과 함께 걱정했다고도 고백한다. 하지만 쿠퍼는 어떤 슬픔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실제로 글로리아는 복잡하고 비극적인 개인사를 겪으면서도 작가, 화가, 자선사업가, 그리고 ‘글로리아 진스’라는 청바지 브랜드의 창업자로 성공적인 사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책에서 가장 좋았던 대목은 아래 두 군데였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삶의 가치를, 그리고 아흔 한 살의 나이에도 앞으로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십니까? 만일 제가 당신이라면 해변이나 어디 휴양지에서 느긋하게 소일하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 말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계발하고, 그것으로 크든 작든 간에 세상에 기여하는 것을 모든 사람은 자기 권리로 생각해야 한다. 부자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달라야 할 이유는 없어. … 부잣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구나.

 

몇년 더 살고 싶은데…. 창조하고 싶은 게 아직도 많이 남았거든.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세상 일들이 결국에는 어떻게 정리되는지 꼭 보고싶기도 하고…. 다음에는 어떤 일이 또 일어날까?

 

"무지개가 나타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글로리아는 2019년 6월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쿠퍼는 CNN의 글로리아 밴더빌트 추도 뉴스를 직접 내러티브하며 몇달 전 병원에서 암 진행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자신의 어머니가 “글쎄, 오래된 노래 같네.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줘. 모든 것이 거기에 있거든”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책의 원제는 <무지개는 피고 지고(Rainbow comes and goes)>인데, 국내 출간본에도 이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무지개는…’은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싯구절에 나오는 표현으로, 모자가 주고받은 편지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쿠퍼에게 어머니는 곧 무지개다. ‘어머니는 무지개가 언제나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바로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으셨어요’라는 아들에게 글로리아는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무지개가 나타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거야’라고 말한다.


쿠퍼가 책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어머니는 평생 가십에 시달린 부잣집 상속녀가 아니라,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삶을 사랑한 무지개 같은 어머니이지 않았을까?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막내아들에게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책을 선물 받고, 자신의 부음 소식을 아들을 통해 알린 글로리아 밴더빌트는 말년이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츠비를 만나러 가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