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H Choi Sep 27.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69  지속 가능한 행복


   장기 여행 예산에 맞추다 보니 도미토리 숙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밤새 시도 때도 없이 들고나는 젊은 배낭여행자들의 신출귀몰에 잠을 설치기가 일쑤다. 운 나쁘면 기차 화통 코골이들까지 복불복.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된 듯한데 여전히 까탈스럽다. 아무튼 오늘도 깨자마자 아침을 충분히 먹고 준비해서 신트라행 기차에 올랐다. 월요일에 문닫는 관광지가 많아서인지 이곳 여행자들 모두 기차역에 몰려왔나 보다. 엄청난 인파다. 어쨌거나 기차에 타긴 했다. 그룹 패키지 여행자들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패키지 기차여행 모양새다.


  종착역 신트라에 모두 내렸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첫 번째 성으로 가기 위해 거의 한 시간을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원데이 티켓으로 리스본의 근교 세 곳을 하루 안에 다 데려다 줄 버스 티켓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이 많다 보니 버스가 와도 다 태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꾸역꾸역 밀어 넣어서 다 태워 보낼 텐데. 버스 회사 여성 직원이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서 한국이라 하자 자신도 언젠가 꼭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오늘 안에 세 곳을 다 돌 수 있느냐고 질문했더니 한국인들은 대부분 다 하더라고 씽긋 미소를 날린다. 역시! 한국인들, 어디 가도 인상적인 기억을 남기나 보다.


  페나성은 그야말로 동화에 나오는 성이다. 백설공주의 성보다 더 팬시하고 성벽 장식도 화려하고 노란색, 주황색, 파란색 등 컬러풀한 색상이 어울리는 듯 어색한 듯 초록 숲 속에 떡하니 솟아있다. 아무튼 왕자와 공주, 기사와 왕비, 마녀가 등장하는 동화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그대로다. 원래 수도원이던 것을 페르디난도 2세가 독일의 건축가를 불러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왕의 침대와 화장실, 정원과 거실, 공주의 아틀리에, 왕비의 테라스, 휘황찬란한 식기들이 놓인 왕족의 다이닝룸, 왕가의 부엌까지 당대에 가장 좋은 것, 화려한 것들로 채웠나 보다. 남의 집을, 그것도 왕의 안방을 들여다보는 재미는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부와 권력자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내 삶, 대중의 살림살이와 극적으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페나성을 둘러싼 울창한 산은 국립공원이다. 성 아래쪽 산등성이에 무어인들이 세운 무어 성벽이 만리장성 미니어처처럼 길게 남아있고 키 큰 초록 나무들이 가득해서 하이킹하기 좋아 보였다. 하루에 세 곳을 가야하는 터라 호카곶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다시 탔다. 오후 3시가 돼 가고 버스 타기 전에 마신 맥주 한 잔 탓인지 엄청 졸렸다. 바깥 구경도 제대로 못 하고 도착하기 직전까지 비몽사몽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제주 해안에 도착한 듯 주차장에 대형 관광차들이 중국과 한국 여행자들을 대방출하고 있었다. 호카곶은 항해 왕자 엔히크가 대서양 항해의 첫 닻을 올렸던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서쪽이다. 높이 140미터의 깎아지른 절벽이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 곳은 순례 마지막 장소 피스테라 느낌이다. 등대도 있고 선인장 꽃도 지천이고 대서양이 눈앞에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내 아들 또래로 보이는 한국 청년은 어머니를 모시고 온 모양이다. 참 바람직한 조합이다. 이들에게 내 사진도 부탁하고 나도 번갈아 모자를 찍어주었다. 사진 찍는 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인종별 차이라기보다는 국적별 차이가 좀 있다. 가장 인상적인 사람들은 중국 중년 여성들. 모두들 하나같이 사진 포즈가 무용수나 배우처럼 발끝 하나를 살짝 들고 45도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시선은 하늘을 보거나 사진사를 정면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분은 손가락도 하나 살짝 들어올려 포인트 한다. 드라마 여주인공의 인상적인 장면인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때 또는 여전히 승리의 브이자나 하트를 만드는 우리나 뭐 별반 차이 없어 뵈기도 한다. 아무튼 재밌는 장면이었다.


  호카곶의 인위적인 구조물은 등대와 안내소뿐 자연 그대로다. 아무런 꾸밈도 없는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평안과 힐링을 선사하니 인간이든 자연이든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갖기 위해 많은 것을 갖출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호카곶이 주는 토닥토닥 위안을 품고 카스카이스로 가는 차 안에서 번뜩하고 떠오른 것은 돌아가서 운전을 해야겠다는 거였다.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내 인생 처음으로 부러운 직업이 트럭이나 대형버스 운전사였다. 구불구불한 길을 대형 박스 같은 차를 부드럽게 조종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특히 버스 운전하는 여성들! 내겐 파일럿보다 더 멋있어 보인다. 장롱면허 7년 차 운전자라 운전은 여전히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다시 운전에 도전 해야겠다. 그래서 떠나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선 편리한 대중교통이 구석구석 이어지고 동시에 건강도 지킬 수 있다는 당위성에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다.(자동차 보유율이 거의 100퍼센트인 요즘 우리 가족은 천연기념물 수준이다) 장단점이 다르지만 자동차가 없다 보니 주변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하고 길에 뿌리는 시간과 돈이 더 들 때도 있었다. 이제 기존의 원칙들을 고집하기보다 편리하고 편안하게 이동하는 수단으로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카스카이스 해변에서 간편하게 햇볕과 파도 아래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인생의 여유와 재미를 거창하게 찾을 것 없다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친구들과 가족과 수건 하나 달랑 들고 해변에 모여서 놀고 서핑보드 들고 기차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더더욱. 가장 가까이 쉽게 언제든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지속 가능한 행복의 조건이 아닐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Sabbatical Year on the roa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