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봄아 Jul 05. 2024

상실, 남아있는 고통에 대하여#05

아들을 잃은 나, 오빠를 잃은 나의 딸

05.아들을 잃은 나, 오빠를 잃은 나의 딸



주말에 한비는 이모랑 할머니와 함께 외갓집에 있겠다고 했다. 신랑과 나, 둘만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한비의 여름방학은 일주일이 남아있다.


한비는 오히려 전보다 더 활달해 보이고 밥도 훨씬 잘 먹고 친구들과 있을 때도 매우 적극적이고 유쾌해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안심이 된다.

속이 깊은 아이라 우리에겐 절대로 힘든 내색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건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한비에게도 견딜 수 없는 게 있었다.  혼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것이다.

한비는 나와 남편 우리셋만 같이 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상황을 초조하고 불안해한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들어오면서 "엄마, 우리 집에 음악을 좀 틀까요? 노래가 나오면 좀 나을 것 같아요" 한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한비가 이제껏 오빠와 함께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적막과 고요를 매우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도 그렇지만 이 낯선 상황에서 아이는 더 길을 잃고 만다.


시우에겐  한비는 태어나면서부터 최고의 경쟁자이며 질투의 대상인 동생이었다.

그나마 크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남매의 관계는 나에겐 늘 고민거리였다.


매 순간 싸우고 티격태격하는 남매지만 그렇게 싸우다가도 가끔 죽이 맞을 땐 잘 때 함께 잔다고 하며 친한 척도 하고 한 녀석이 없으면 심심해 못 견뎌하고 가족 중에 좋아하는 순위를 매기자면 엄마 아빠보다 서로를 1등으로 두는 믿지 못할 순위를 매기기도 했다.

오빠가 혼이 날 땐 엄마가 회초리라도 들 것 같은 상황에는 적극적으로 나를 말렸다.

한비가 친구들이나 누군가에게 불만을 표하면 시우는 오빠가 혼내준다며 제법 의리도 보였다.


시우와 한비는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애증의 관계인 보통의 남매였다.


매일 경쟁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티격거림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그렇게 곁에 두었던 너희 남매.

처음엔 나의 비탄에 가려 한비의 상실감에 대해 크게 인지하지 못했다.


이렇게 글로 적어 보니 그토록 끈끈하게 엮여있는 남매였던 것을, 오빠에 대한 한비의 상실감을 나는 바라보지 못했던 거였다.


나에게는 서로 싸우기만 잦고 그다지 평화롭지 못한 남매였지만 저희들에겐 그런 다툼 또한 서로를 의지하고 확인하는 둘만의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오빠라는 존재로서의 상실이 더 현실적이고 직접 피부에 와닿는 상실이었으리라. 내 상처 때문에 미처 인지하지 못한 한비의 상처가 아프다.  

빨리 개학을 해서 아이가 학교생활로 바쁘게 지내는 것이 좋겠다 싶다. 어른도 감당하지 못하는 이 불안과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는 감정에 아이는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두려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시에서 지원하는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신청을 했는데 '대기자가 많아서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답변이 왔다. 빨리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 신랑이 출근하고 나서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울었다. 수학여행 사진 속의 시우와 시우방에 걸린 책가방과 모자, 그리고 시우가 늘 잘 때 끼고 자던 식빵모양 인형과 함께.

그렇게 한참을 통곡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안하다.


나의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시우로는 부족했다. 우리 시우가 얼마나 단단하고 싱싱한 육체를 가진 건강한 아이였는지 그 뽀얗고 탱글탱글한 볼과 통통한 손과 팔, 이제는 엄마보다 두 사이즈나 커져버린 두툼한 발까지... 유쾌하고 천진한 웃음과 장난기 가득한 눈... 엄마 아빠를 닮지 않은 노래와 춤에 재능도 있어서 나중에 커서 예능피디를 해도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우리 아들...


이제 제법 컸다고 엄마를 위해 주고 걱정해 주는 말과 행동으로 종종 나를 기쁘게 해 주던 듬직한 아들임을...

수만의 기회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음을... 부모의 절대적인 돌봄을 벗어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가끔은 친구처럼 소통할 수 있는 청소년으로 성장하던 아이를.... 나는 잃었다.




시우의 방을 나와 씻고 집을 나섰다. 남편의 와이셔츠를 세탁소에 맡기고  시우 학교 학부모들 중 나와 친한 지인들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시우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시우를 6학년 학기 초에 친하게 지내는 언니의 수학 공부방에 몇 달을 보냈다.

사실 6학년이 된 후로 시우와 나는 거의 매일같이 전쟁에 전쟁을 거듭하는 전시상태였다.


제법 머리가 커져버린 아들을 유치원 때와 똑같이 아이 취급을 하며 공부와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잔소리를 하고 또 듣지 않으면 소리치고 혼내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지쳐갔다


다행히 그 시기에 공부방 선생님인 해란 언니가 시우와 나의 메신저 역할을 해주었다. 나에게는 하지 않던 자기반성과 마음속 이야기들, 엄마를 많이 사랑한다는 증명을 언니가 매일같이 시우에게 받아서 내게 전달해 주었다.


그때 언니 공부방에 시우를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너무 괴로워서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언니는 시우와 자기가 몇 달간 가까이 지내며 이야기하고 시우의 속마음을 들여다봐서 자신의 친구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이 든다고 말했다. 시우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다고, 왜 선생님들이 시우를 예쁘다고 하는지 자기는 안다고 했다. 너무 고맙게도.


친하게 지내던 학부모 셋과 우리 집에 왔다.

사고 이후 처음 우리 집에 온 해란 언니는 시우방을 보자마자 주책없이 눈물이 났다며 미안해한다.

방학식 날 시우의 물건들과 함께 받아온 반 친구들의 롤링페이퍼와 일기장, 시우가 남긴 글들과 자작 시 등을 보여주고 시우 어릴 때 사진도 함께 보며 웃고 울고 했다.


비로소 내가 아닌 남들이 시우를 증명해 주니 살 것 같았다. 고마웠다.

시우를 생각하다가 설움이 복받치면 누구든 붙잡고 묻고 싶다. 우리 시우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알고 있지 않냐고...


이제는 우리가 함께한 수많은 기억들과 소소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이 무뎌지고 사그라질까 봐 겁이 난다.

생각이 나서 괴롭고 아픈 것보다 조금씩 잊혀 저 갈 기억의 소실이 두려워진다. 



애도에는 지름길이 없다.


애도의 핵심은 슬픔을 직면하고 겪어내는 것이다. 

애도를 피하거나 빨리 끝내려는 노력은 마치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는 것과 같다.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차피 통과해야 할 슬픔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한 후에는 또 다른 내가 되어있을 것이다.

상실의 슬픔을 무사히 통과한 후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제발 이 슬픔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 주의 손으로 붙드소서... 잡을 곳이 없는 벼랑 끝의 나를


2016년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당시 2년간 기록했던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기일이 8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갔던 피투성이였던 나는 시간이 처방하는 어느 정도의 망각을 통해 상흔을 남길지언정 흘리던 피는 서서히 멈추고 상처는 단단해진 채 상실의 아픔도 나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랬다고 지금도 이렇다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실, 남아있는 고통에 대하여#0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