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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아 Jul 14. 2024

상실, 남아있는 고통에 대하여#11

우리가 함께였던 제주, 네가 없는 제주에서


11. 우리가 함께였던 제주, 네가 없는 제주에서


제주에 왔다. 시우가 3학년이었던 2013년에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함께 제주를 왔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왔던 제주가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몰랐었다. 그렇게 제주는 / 여유가 생긴다면 '동경하는 여행은 동남아의 에메랄드 바다지'라고 생각했던 / 나를 매혹시켰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제주에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곳. 제..주..도..


그런데 벌써 3년이란 시간이 지나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정신없고 바빴던 걸까...

시우를 보내고 사진들을 정리하며 컴퓨터에 저장된 2013년 제주의 사진을 얼마 전에야 다시 보게 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제주여행 가족사진 폴더를 정리하고 사진도 찾아서 앨범을 따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들을 했던 것도 같다.

2013년 제주일주, 2014년 경남일주 등  이후에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들을 여유 있게 시우와 다시 보지 못했었다.

함께 보며 추억하지 못한 시간들이 야속했다.

사진 속의 우리는 너무 행복했고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 제주를 다시 찾았다.


이번 추석엔 종갓집인 시댁에 가서 어른들을 뵙는 걸 피하고 싶었다. 시댁은 9남매의 종갓집이고 남편은 그 집의 장남이므로 나는 종갓집의 맏며느리다. 설날이 되면 30인분이 넘는 떡국을 끓여야 하고 명절과 제사 때마다 시댁은 발 디딜 틈이 없이 직계가족들로 꽉 찼다. 나는 친가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빠와 이혼한 고모뿐이라 명절이 되어도 평상시와 별다를 게 없었고 종교도 기독교라 제사가 없었다. 그래서 종갓집에 대한 두려움이나 개념이 없어서 시댁이 종갓집이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명절과 제사 그런 것들을 겪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남편의 장교시절은 제사 참석도 잘 못했지만 평생 이것을 감당한 시어머니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 이번 명절은 그 의식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도 그런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운이 좋게도 추석연휴인 성수기에 4박 5일을 숙박까지 모두 예약하고 올 수 있었다.

처음엔 우리 셋만 가려고 했다. 남편에게 어머님께도 한번 여쭤보라 했더니 같이 가자고 하셨지만 어머님은 추석 차례 전에 먼저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시부모님과는 2박을 함께 하게 되었다.


시우없는 여행은 모든 것이 제 힘을 갖지 못했다.

여행 전 일정을 짜기 위한 설렘도 없었고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도 알아보고 싶지가 않았다.

여행 전날 급히 옷가지만 대충 챙겨서 떠났다.

지난 제주여행, 우리가 함께였을 때는 공항에서부터 아니 여행을 결정했을 때부터 설렘으로 가득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렌터카를 픽업해서 제주시에 들어섰을 때, 길가의 이국적인 가로수를 보면서부터 우리는 제주가 기대되었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그냥 길에 핀 나무와 꽃, 귤밭, 판에 쌓아놓은 , 정겨운 옛집까지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다웠다.


다시 찾은 제주는 선명한 컬러의 uhd영상이 색채를 잃은 흑백화면이 된 것처럼 그렇게 밋밋하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 그림에 시우만 빠져있는 것에 서늘하게 가슴이 저려왔다. 멋진 풍경도 맛있는 음식 모든 것이 부족했다. 모자랐다... 분명히 같은 곳이지만 천국과 지옥은 내 안에 있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속 지나간 추억들이 눈물 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지금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며 각자 다른 생각 속에 빠져있다.


제주공항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협재로 그리고 사려니숲을 지나 예약한 숙소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에 시부모님은 콘도에서 쉬시고 제주에 살고 있는 남편의 친구인 정규네 가족과 만났다.

함께 저녁을 먹고 정규네 집에서 맥주 한잔을 마셨다. 우리 한비와 동갑인 정규네 딸은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가 불편하다. 아주 어릴 때 봤는데 한비만큼 컸고 성격도 밝고 적극적이어서 한비한테 호감을 보이고 좋아해 주어 고마웠다.

정규 와이프인 해나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아픈 아이를 키우다 보니 사람들이 자기 아이가 조금 아플 때 모습을 보면 호들갑처럼 보여'라고 했다. 아픈 딸에게 집중하기 위해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고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아픔도 아이를 온전히 잃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나의 기준 역시 이기적이다.

선천적으로 아픈 아이를 돌보는 정규네 삶도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그런 삶이다.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삶일지 상상해 보면 해나의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간다. 우리부부도 정규네 부부도 모두 일찍 만나서 일찍 결혼을 했다. 대학 캠퍼스 커플이던 이 부부와 고등학교 때 만난 우리부부가 갓 스무 살 스물한 살 때 처음 만났을 때 해나는 성인이라고 보기도 힘들 만큼 여리고 학생 같았다. 나를 언니라 부르던 소녀였던 그녀가 한 아이를 책임지는 엄마가 되어 저렇게 강해져 있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모두가 자신이 감당해 내야 할 짐을 지고 그만큼 단단해져 가는 걸까...


우린 각자에게 주어진 분량의 삶을 지고 간다.
그것이 무겁던 가볍던 모두 각자의 몫인 것이다.



친구 부부는 힘겹게 우리를 위로하는 말을 꺼냈다. 시우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장례예배가 끝난 뒤라서 오지 못해 미안했다고. 뭐라 무슨 말로 위로할지 모르겠다며 울었다. 결국 제주에 와서 참았던 눈물이 흘렸다.

위로의 말을 꺼내고 싶은 사람도 그 위로를 받아야 하는 우리도 모두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이 혼란함을 우리는 평생 함께 해야 한다. 


언젠가 다시 제주에 왔을 때 그때는 좀 더 홀가분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제주를 전처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까... 울지 않고서도 우리가 함께했던 그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


2016년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당시 2년간 기록했던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기일이 8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갔던 피투성이였던 나는 시간이 처방하는 어느 정도의 망각을 통해 상흔을 남길지언정 흘리던 피는 서서히 멈추고 상처는 단단해진 채 상실의 아픔도 나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랬다고 지금도 이렇다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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