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엣 세테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음 Jan 26. 2021

꼬마 에세이스트의 퇴고 일기

꾸준히 꾸역꾸역 꿋꿋이~

출퇴근 버스에서 틈틈이 출간 원고를 고치고 있다. 매일 차가 막히니 버스 안이 살금살금 움직이는 작업실 같다. 퇴고 작업이 하루하루 새롭고 기쁠 줄 알았으나, 하루하루 새롭게 어렵기만 하다. 내 글은 내 자식이라기보단 남의 자식 같다. 잘 챙겨야 하는데 약간 낯설고, 오래 보면 피로하다. 그래도 가격이 매겨지는 글을 쓰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0원인 글을 쓸 때보다 조심스럽고 정중한 즐거움이다. 태어나서 진지한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건 처음이다. 모든 진지함에서 추방당하던 내가, 아무리 해도 남들만큼 정중할 수는 없는 내가 어떤 유형의 젠틀맨이 될지 모르겠다. ‘진지함’의 사전적 의미처럼 ‘참되고 착실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가 서술했듯이, “대머리가 되어가는 아마존 밀림에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책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은 팔다리를 버둥대는 우주인처럼 요란하고 고요하다. 하지만 이런 버둥버둥은 패닉이 아니라, 자신에게 마땅한 지면이나 수면을 직접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곳이 어디든 즉시 착지하려고 발을 굴러대는 것이다. 열심히 버둥버둥하다 보면 자신의 아등바등을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당선의 설렘이 가라앉고 ‘진짜 글쓰기’가 시작되면 세미 소크라테스 같은 상태가 될 줄 알았다. 나 자신을 미치게 깨달아 내 속의 제정신이 눈을 뜨는 상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오래니 환생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나로 태어나 줄 생각은 없었나 보다. 나훈아 선생님은 형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반말로 부르니까 안 와주는 걸 수도 있다. 어쨌든 내게는 쓸 만한 생각들이 별로 없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100마디 어절이 한꺼번에 떠오르곤 한다. 열 맞춰 차례대로 오면 좋을 텐데 기억력과 집중력이 없어 내가 하는 말들을 자꾸 놓친다.


예전에는 떠오르는 생각들이 너무 많이 사라지는 것 때문에도 ADHD가 싫었다. “오!” 하고 나서 “방금 왜 오!라고 했지?” 추적하는데 시간을 다 쓰는 것이다. 긁을 수 없는 곳이 간지러우면 생각 자체가 성가셔진다. 하지만 성가시다는 인식도 생각이어서, 성가시다는 느낌에 파고드는 것으로 궁극의 성가심이 완성된다. 나의 작문은 하루하루 절대로 1층에 닿지 않는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는 일 같다. 나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의 사용만을 허용받은 창작자이다. 운동하지 않고도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피곤을 느껴서, 실제로는 전혀 운동하지 않는다. 인내심이 깡말라서 몸통은 통통한 것인가? 통통해도 좋으니 통통 튀는 생각들이 와주면 좋겠다.


퇴사 생각이 없기 때문에 출근과 퇴고를 병행 중이다. 당선 직후엔 “이야! 사표각이다!” 싶었는데 (ADHD라면 이 대책 없는 급발진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그건 일종의 “신난다!” 같은 탄성에 불과해서 당연히 다니고 있다. 들뜰 때의 나는 철없이 구리고 아연하다. 철은 아주 흔하고 무겁고 일상 곳곳에 쓰이는 금속인데 어째서 내게만 없을까? 대신 나는 구리처럼 분노 전도율이 높고 아연처럼 습기에 약하다. 그래서 스스로의 눈물에도 쉽게 산화되는 것이다. 화학에 지식도 없으면서 이런 비유를 하는 게 나의 유머이다. 하지만 본인조차 안 웃는 유머는 다큐가 되기 때문에, 내 발언은 장르를 휙휙 바꾸며 다시 우스워진다.


퇴고 전에는 남는 시간 전부를 퇴고에 쓸 작정이었다. 이것은 내가 시간 계획에 실패하는 이유기도 한데, 7시에 퇴근해 3시에 잠드는 스케줄을 ‘8시간 확보’로 생각하는 것이다. 시간을 더하기와 빼기로 계산하면 반드시 망한다. 그걸 깨닫는데 30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차마 믿을 수 없다. 이를 테면 시간은 사칙연산 같아서...... 곱할 일은 없어도 나눌 일이 무척 많다. 아이폰 쿼티 자판에 나눗셈 기호가 없는 걸 보면 사람들도 나눗셈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솔직히 나눗셈은 졸렬한 ‘응’처럼 생겼다. 살찐 이응 2개를 자꾸 나누다 점으로 종결된 것 아닐까? 하지만 제일 졸렬한 것은 결국 나인데, 나눗셈을 잘 못해서 호시탐탐 모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학, 과학, 영어를 너무 못해 한국어만 등장하는 글을 쓰게 됐으니 내 불가능들은 어떤 의미의 ‘선택과 집중’이다. 내 모든 사건들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온갖 집중을 강요받는 상태로 전개되어 왔다. 학업과 취업이 특히 그러하여 활기를 잃었었다. 반면 글쓰기는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집중이 살아나는 영역이다. 글을 쓴다는 이유로 앞자리가 바뀐 내 나이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기 싫을 땐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내가 된다. 갑자기 유튜버나 소설가, 시인을 꿈꾸고 싶어 지는 것이다. 하지만 내 몫의 직업들은 회사원과 에세이스트이기 때문에 시시덕거리다가도 곧 다시 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민음사 방문기 (2) - 첫 미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