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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완 Jan 20. 2016

Prologue

시선에 관하여

긴 여행을 떠나기 전날. 한 술집에서 한동안 하지 못할 우리말을 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긴장감이 있었고 비장한 출사표를 만드느라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러던 중에 하필이면 처음 보는 옆자리 사내에게 인간에게 있어서 여행의 필요성에 관하여 설명하게 되었다. 한동안 하지 못할 한국어였으면 차라리 다른 얘기를 하는 편이 더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꽤 오랫동안 정리했던 여행의 의미에 관해 역설했지만, 그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그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오랫동안 여행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오?”였다.


온갖 멋진 말을 갖다 붙여도 그에게 여행은 사치였고, 나는 그를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통해 내가 애써 만든 인간에게 있어서 여행의 필요성에 대한 이론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출발선에 서서까지 달릴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고 있는 주자 같았다. 하지만 달리는 것은 좋다. 그것이 이유라면 부족한 것일까?


몇 가지 하고 싶은 일은 있다.


타투. 종아리 뒤에 고양이를 두 마리 그려 넣고 싶다. 고양이는 서로 쳐다보는 게 좋을까? 아니면 각자의 시선을 가지는 게 좋을까? 한 마리는 쳐다보고 다른 한 마리는 외면하고 있는 게 좋겠다. 고양이는 대게 그러니까.


우쿨렐레를 사서 방안에서 혼자 튕기고 있는 나를 그려봤다. 무엇이든 튕기고 놀기 좋아하는 태국에는 분명 싸고 좋은 우쿨렐레가 있을 것 같다. 크기도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에 좋고.


수영복과 선글라스도 살 생각이다. 통 넓은 태국 바지도 사고 이왕이면 꽃무늬가 그려진 것으로 사야겠다. 에스프레소 잔도 두 개는 필요하고 골동품 수동 커피 그라인더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써보니 죄다 뭘 사겠다는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타투도 우쿨렐레도 수영복도 사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좋다. 이번 여행으로 무언가 커다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웅대한 자아 발견은 이미 어릴 때 다 했다. 여전히 타국의 문화는 낯설고 불편하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호기심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나 자신과의 대화는 어디에서건 많이 하게 되었고 특별히 어디론가 떠나야 할 이유는 이제 없다.


그 사내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떠나도 되는 것일까? 그 질문만이 자꾸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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