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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Feb 03. 2022

그래도 널 건드리진 않았잖아

아빠-1

아빠는 참 나약했다. 34살이 되도록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을 모두 합쳐도 한 달은 될까 싶을 정도라서 내가 모르는 모습이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학도 졸업하고 돈도 벌어 여유가 생긴 다음 돌아본 아빠는 참 나약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나약해서 본인의 부모님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아내에게도, 자식들에게도 자신에 대해 한마디 설명도 하지 않고, 그 모두의 말들을 한 마디 대답도 없이 한 귀로 흘려보내며 피해만 다녔다.


아빠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장면이 거의 없다. 부모님의 결혼부터 내가 9살까지 살던 판잣집에서는 토끼 그림을 그려달라는 나에게 고추가 커다란 토끼를 그려줬고, 밥상머리에서 엄마에게 야한 농담을 했었다. 그 나이 때는 성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을 때였는데 본능적으로 '이 얘긴 아빠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거 같은데'라고 느꼈어서 기억이 강하게 남은 듯하다. 주말에 다 함께 공원에 가기로 했는데 그날 또 들어오지 않아서, 며칠 후(그때서야 집에 왔기 때문이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는데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발을 씻는 것을 나와 동생이 함께 본 적도 있다. 나들이에 신이 나서 한동안 들떠 있었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매우 실망했었지만, 그래도 엄마에게 혼나는 아빠가 불쌍하기도 해서 '다음에 가면 되니까 그만하면 좋겠다'하며 봤던 것 같다. 그런 일은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고함지르는 엄마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고, 엄마의 고함이 줄어들어들 때쯤 나와 동생에게 웃으면서 와서 장난을 쳤었다.

내 기억의 시작부터 있던 큰 개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던 적이 있다. 울며불며 다시 개를 키우고 싶다고 떼를 썼었는데 엄마는 반대했고 아빠는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친척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 엄마와 동생은 먼저 가고 나와 아빠만 남아있었다. 아빠와, 심지어 둘만 있는 시간은 아주 드문 순간이었기 때문에 이때다 싶었던 나는 또다시 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개 키우고 싶냐며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 손에 들려주고 사라졌는데, 그 종이가방 안에 강아지가 있었다. 네모난 입구 속에 조그만 흰 강아지가 꼬물거리던 게 눈에 선하다. 그 직후는 기억나지 않고, 화장실에서 발을 씻는 아빠에게 엄마가 고함을 지르고 그 뒤에 나와 동생이 앉아 강아지와 놀던 기억이 난다.




10살 때 원래 살던 판잣집이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로 이사 갔다. 그때까지 내 친척 중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사장인 외삼촌뿐이었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이사 갈 집을 구경 갔을 때 '우리도 이제 외삼촌네처럼 아파트에 사네'하며 부자가 된 기분에 좋아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멀리서부터 보이는 큰 단지를 향해 걸어가는데 저기에 우리 집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벅찼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를 몇 번 반복하다가 드디어 '여기야'하면서 우리 집이 있는 동을 처음 봤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크고 넓게 생긴 동, 동 앞마다 있는 놀이터, 뒹굴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풀밭... 그때가 해 질 녘이었는데 미색인 아파트에 붉은 햇빛과 그림자가 생겨있고,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아파트 건물 사이로 번져가고 있었다.


거기로 이사한 후로는 아빠를 더 못 봤다. 그전까지 엄마는 왜 이렇게 아빠는 집에 안 들어오거나 늦게 오냐고 묻는 나와 동생에게 '야근이 많으셔서 그래'라며 변명을 해주셨고, 엄마가 아빠에게 고함을 질러도 난 그 분위기가 무서워 그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서 어떻게든 그 분위기를 풀어보려 하고 엄마 아빠를 따로 달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든 과정은 사라졌다. 우리 남매는 아빠가 안 들어와도 행방을 묻지 않았고, 출근한 아빠에게 연락할 방법이라고는 회사 전화가 다였던 시기에서 전 국민에게 휴대전화가 보급되던 시기로 변했지만 잘 시간이 다되도록 들어오지 않는 아빠에게 전화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하교했을 때 뜬금없이 집에서 걸레질을 하는(오랜만에 들어오면 꼭 온 거실을 세제물을 풀어 닦았다) 아빠에게 '안녕하세요'라는 말 외에 아무것도 묻지도 않았다. 그런 날 밤이면 나와 동생이 잠든 후(라고 생각되는 후에)에 엄마의 고함소리가 들려도 나가서 둘 사이를 중재하거나 그다음 날 엄마 아빠에게 애교를 떨지도 않았다.


그러니 남은 기억은 더 없을 수밖에. 어느 날 '아빠 친구가 휴대전화 가게를 차려서 팔아준다고 샀어,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거라던데'하며 휴대전화를 사 오셨는데, 갖고 싶었기는 했지만 내 취향에 너무 안 맞았는데 여기서 나까지 시큰둥하면 아빠가 정말 이 집에서 있을 자리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좋아하는 척을 했다. 그 휴대전화는 평소에는 들고 다니지 않고 나와 동생과 엄마가 각자 정기적이지 않은 외출을 할 때만 함께 사용했다. 책상에 놓고 쓸 스탠드를 사달라고 하자 전구를 책상 위 천장에 매달아 주신 적도 있었다. 전기선을 요리조리 빼서 책꽂이 옆에서 스위치를 켤 수 있게 만들어 주셨는데 굉장히 신기하고 기뻤다. 아빠가 나를 위해 한 것 중에 가장 긴 시간과 돈과 움직임을 들여한 것이지 싶다. 아니지, 수능날엔 아빠가 나를 데려다주며 따뜻한 캔음료를 하나 사주시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네. 왜 데려다주셨지?


그 집에 이사한 후로는 아빠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항상 엄마가 없을 때만 골라서 왔다. 내 방과 안방에만 문이 있고, 동생 책상은 거실과 미닫이문으로 분리된 곳이 이었는데 미닫이문을 떼고 썼기 때문에 방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 방은 복도식 아파트인 우리 집의 복도 옆방이었기 때문에 바깥소리가 매우 잘 들렸는데, 아빠 친구들이 오는 날이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동생이 내 방에 와서 함께 방문을 닫고 있었다. 나가서 인사를 한 적도, 나와서 인사를 하란 말을 들은 적도 없다. 문 밖이 시끄러웠다가 조용해졌다가 다시 시끄러워졌다가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조용해지면 동생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갔다. 엄마와 동생이 자는 안방에 엄마와 나와 동생이 밥을 먹는 식탁이 들어가 있었다. 식탁 위에는 담배 재들이 떨어져 있고 술과 술잔들이 남아있었다. 우리가 거실에 나올까 봐 무서웠는지, 원래 그렇게 갇힌 느낌으로 있는 것이 그들의 규칙인 건지 안방의 베란다 문과 방문을 모두 닫아놔서 담배냄새가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엔 엄마와 동생 옷과 이불들이 있는 곳인데. 우린 이미 이걸 봐버렸지만 엄마는 아직 못 보셨으니까, 앞으로도 보시지 않으시도록 집의 모든 문을 다 열고 식탁과 의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담뱃재를 닦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의 귀가는 점점 드물어졌다. 그러다 수능이 끝나고 엄마가 말해주셨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아빠가 계속 늦게 들어오거나 안 들어오는 건 야근 때문이 아니라 도박 때문이라고. 야근 때문이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릴 때나 야근의 뜻을 몰랐지 점점 자라면서 야근이라는 건 내 아빠의 야근처럼 자주 그리고 며칠씩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모든 시간들이 근무시간이었다면 우리 가족이 스탠드 살 돈이 없어 전구를 천장에 다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엄마의 입으로 야근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을 직접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래도 그 정확한 문장으로 인해 그때까지 묘하게 맞지 않던 나와 동생의 목격담의 앞뒤가 잘 맞기는 했다. 아, 그때 우리의 식탁을 우리의 안방에 들고 들어가 그 사람들은 담배와 술을 하며 게임을 하고 있었겠구나. 게임장이 문을 닫은 날이었나 보네. 며칠 만에 들어오는 집에 딸의 방문이 닫혀있는데도 인사할 생각도 하나 없이 우 하고 들어왔다 우 하고 나갔던 거네. 참 신났겠다. 그 문장을 들은 후로도 아빠를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이미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은 아빠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나까지 그러지는 말자'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몇 년 후 화가 난 적이 있었다. 내가 아빠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빠가 나에게 한 말은 정확히 기억이 난다.

"그래도 널 건드리진 않았잖아."

나에게 싫거나 충격적인 일이 있을 때 종종 그렇듯 그 앞뒤 상황은 날아갔고, 이제 난 아빠와 얘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 문장의 뜻을 알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뉴스 등에서, 부모에게 정신적 육체적 성적 폭력을 당한 자식의 얘기를 접할 때마다 그 문장이 떠오른다. 셋 중에 뭘로 날 안 건드렸다는 걸까?


어릴 때, 특히 아빠와의 기억이 너무 없어서 진짜 못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너무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내가 스스로 기억을 날려버린 건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상담 선생님께 '제가 아빠에게 육체적이나 성적 폭력을 당했었는데 그걸 잊고 사는 건 아닌가 무서워요'라고 했더니 '아빠가 할아버지한테 많이 맞고 자랐다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아빠가 지원 씨를 때리진 않았다면서요(그렇다, 우리 집의 훈육 담당은 엄마였다). 아빠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모에 비해서 자기가 잘한 행동은 자식을 때리지 않은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그 말을 한 걸 거예요. 지원 씨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서운 일은 없었을 거예요.'라고 하셨다. 내 힘이 있을 때는 그 문장이 떠오를 때마다 '지랄하네, 내 기억이랑 마음 너덜너덜 해진 건 알 생각도 없겠지'하며 멀리 퉤 날려 보낼 수 있는데, 힘이 없을 때는 '건드렸는데 내가 기억 못 하고 계속 그나마 지한테 잘해주니까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던 건 아닐까' 하며 땅굴을 파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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