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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Mar 18. 2022

낚싯대 좀 가져다 줄래?

아빠-2

난 20살 3월에 대학에 갔다. 통학 거리가 40분 정도 됐는데 초중고를 다 걸어서, 혹은 걸을 수 있는 거리에서 다닐 수 있던 나에겐 그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었다. 물론 18학점에 불과했던 첫 학기의 수업 때문에 통학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동아리 때문이었다. 예체능 중에서는 미술만 좋아했었고 잘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음악과 체육의 환상의 조합인 풍물 동아리에 푹 빠져있었다. 수업 틈틈이 동아리방에 가고, 수업 끝나고 나면 당연히 동아리방에 가고, 연습하고, 풀게 없어도 뒤풀이하다 보니 막차로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한 번은 버스에서 자다가 눈을 뜨자 버스 종점이고 택시를 탈 돈은 없어서, 중학생 때 친했던 친구 집이 그 근처라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중학교 졸업 후 처음 연락해서 자고 온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의 귀가 시간이 일정했기 때문에 아빠의 존재 유무를 매일 알 수 있었지만 대학교에 들어가고나서부터는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없어서 내 눈앞에 없는 건지, 내가 집에 얼마 안 붙어 있어서 내 눈앞에 안 보이는 건지. 그렇게 1년을 지내는 동안 엄마의 분노는 점점 치솟았고 '이럴 거면 편입해서 학교를 옮겨라'라는 말이 나왔을 때쯤, 학교 기숙사 정책이 무조건 성적순으로 입숙시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시내에 살던 나에겐 아예 선택지가 없었는데 말이다. 겨울 계절 학기를 신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2학년 때 기숙사에 산다고 집에는 더더욱 들어가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갔던 것 같다. 그땐 2살 터울인 동생이 고3일 때라 집에 가서도 별로 얘기도 못했었다. 2학년 또한 풍물 동아리에 푹 젖어 살았다. 그리고 21살 겨울에 약대 입학시험인 PEET 공부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집이 난리가 나있었다. 앞뒤 순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집의 온 물건에는 빨간딱지가 붙어있었다. 아빠의 20년 동안의 늦은 귀가와 수많은 외박이 돈을 벌기는커녕 돈을 잃는 행동과 관련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첫 순간이었다. 검은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우르르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엄마는 괜찮다며 들어가 있어라 하셔서 동생과 내 방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거실에서 아저씨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아저씨들이 우르르 나가고 나서 어떤 여자분이 들어와 엄마와 얘기를 하는 게 들렸다. 엄마가 설명해 주신 건지 내가 맥락상 상상을 한 건지 헷갈리는데, 아마도 아저씨들이 들어와서 돈 갚으라고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고 나가고 나면 여자분이 들어와 엄마를 다독이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빨간딱지에는 '이 딱지를 떼지 마라'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 상태로 살아야 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명치가 굳는 느낌이었다. 이 빨간딱지를 붙이게 한 사람은 빨간딱지가 없는 곳에서 빨간딱지를 안 보고 지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참 아빠가 미웠다. ㄱ자 벽에 붙여 3인용으로 쓰던 식탁에 엄마와 동생과 셋이서 앉아 우리 어떻게 되냐고 묻기도 했다. 우리 이제 좀 있으면 빨간딱지 붙은 냉장고, 식탁, 의자, 전자레인지, 밥솥, 책상, 컴퓨터 등등 다 없어지냐고. 엄마는 이런 거 다 팔아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저 사람들은 빨리 돈 갚으라는 걸 이런 식으로 압박하는 거라고 했었다. 아주 훌륭한 압박 방법이긴 했다. 집 안 모든 걸음걸음, 모든 눈길마다 빨간딱지가 밟혔으니까.


내가 기숙사에서 지내던 한 해 동안도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내가 본 빨간딱지가 붙기 전, 많은 사람들이 집에 드나들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동생은 엄마를 지키겠답시고 그 사람들과 엄마 사이에 서고.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동생 휴대폰으로 '아빠 오늘 집에 들어왔냐, 연락 온 거 없냐'라고 묻기도 했다고 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지, 집에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달은 갔는데, 연락은 자주 했는데 어떻게 이 모든 일을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 이에 엄마가 '네가 알아도 바뀌는 게 없는데. 니라도 즐겁게 대학 생활하는 게 낫지.' 하는 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 바뀌는 게 없지. 오히려 21살짜리 여자애가 보였으면 아주 잘 활용되었을 수도 있다. 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은 내 생각보다도 꽤 구체적이어서, 그다음 해에 영화 '화차'를 본 후 꿈을 여러 번 꾸기도 했을 정도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데 '여기 ㅇㅇㅇ 딸 있지?' 하면서 아저씨들이 찾아오는데, 강의실에는 아저씨들이 들어온 앞 문밖에 출입구가 없어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사지가 분질러져 죽는 꿈.




그렇게 시작한 PEET 수험기간은 평화로웠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빨간딱지는 사라졌고 집의 물건들은 그대로 남았다. 힘든 고3 시절을 보낸 동생은 재수를 하기로 해서, 세명이 함께 아침을 먹은 후 엄마는 출근을 하시고 수험생인 나와 동생은 집 근처 독서실로 함께 갔다. 그리고 집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다시 독서실, 집에 저녁 먹으러 갔다가 다시 독서실, 그리고 귀가. 8개월 정도의 수험기간 중에 중학교 친구들과 풍물동아리 친구들이 몇 번 동네로 놀러 와서 함께 던킨도너츠에 가거나 피자를 사들고 집 근처 평상에 앉아서 먹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연초에 겪었던 일들은 빨간딱지와 함께 없어진 것 같아서인지, 꼼꼼히 생각해보면 좋을 게 없던 해가 분명한데도 그때의 던킨도너츠나 평상에서의 장면은 아주 즐겁게 남아있다. 에어컨 바람이나 평상 위의 바람과 함께.


그렇지만 끝은 아니었다. 아빠의 연락이 종종 왔다. 그 전해에 많은 장면들을 온몸으로 겪은 동생은 '아빠 마주치면 죽여버릴 거'라 하고 있었고, 술이 부쩍 는 엄마에게는 아빠 얘기는 입도 열 수 없었다. 아빠에게 나쁜 기억이 '있는' 엄마나 동생과는 달리, 난 나쁜 기억조차 '없었기'때문에 밉다기보다는 답답하고 안쓰러운 감정이 더 컸다. 그걸 아빠도 알았겠지. 평생 동안 아무리 아빠에게 연락을 해도 연결된 적이 없으니, 하물며 아빠에게 연락을 받은 적은 더더욱 없었는데 그 수험기간 동안에는 몇 번이나 연락이 왔었다. 그런데 나에 대한 연락도 아니었다. 지금 집에 우성이 있냐, 엄마는 어디 갔냐 등 다른 두 사람의 동태를 묻는 내용이었다.


그날은 전화가 왔다. 아빠한테 전화가 오다니. 내가 아빠에게 수없이 건 전화도 모두 부재중 전화로 남았는데. 그에 대한 답변도 없어서 답 문자나 전화를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전화까지 할 정도면 엄마나 동생에 대해서 물으려는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아빠는 날 그나마 편해하니까, 20년 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나에게 설명을 해주겠지, 하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아빠의 용건은 이거였다.

"어어, 그래서, 베란다 구석에 보면 낚싯대 여러 개가 같이 있을 거야. 뭔지 알지? 그 낚싯대 좀 가져다 줄래?"


낚싯대... 그 전화를 받았던 22살까지 제대로 된 가족여행 한번 가본 적이 없는데, 그나마 여행 비슷하게 갔던 것이 아빠가 친구들과 낚시하러 갈 때 가족들도 다 함께 간 거였지... 그동안 그만큼 집에 사람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한 게, 아무도 없을 때 낚싯대 들고 가려고 그런 거였구나... 자식 둘 다 수험생에 아내는 일하러 나가고 집에 빨간딱지 붙었을 거 뻔히 아는 사람이 그에 대한 말 한마디 없이 낚싯대라...


기가 찼다.

전화로 안 되겠다는 느낌이 왔다. 낚싯대든 뭐든 핑계 삼아 눈앞에 두고 마주 앉아 따져 묻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랑 동생에겐 꼭 비밀로 하고 낚싯대 없어진 거 티 안 나게 해라'는 속 뒤집어지는 사항들을 들으면서 약속을 잡았다. 드디어 약속 당일. 동생에겐 점심 약속이 있다고 하고, 낚싯대를 챙겨 막 출발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갑자기 일이 생겨 오늘 못 만나겠다고. 약속시간 30분 전이었다. 화가 나서 그럼 언제 보자는 거냐, 나 벌써 출발해서 다시 못 돌아간다고 하는데 전화가 뚝 끊겼다. 딱딱해진 명치가 몸 안에서 조각조각 부서져 피부를 찢고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며칠 뒤에 다시 약속을 잡아보자는 문자가 왔지만 무시했고, 그 뒤에는 연락이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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