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머리였을때

옛날사진

by Jeeae

그때 나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허리께까지 내려오던 머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뒤에서 천천히 흔들렸고, 사람들은 가끔 나를 스쳐 지나가며 한 번 더 돌아봤다. 특별히 예뻐 보이려고 기른 머리는 아니었다. 그냥, 나라는 사람이 아직 쉽게 잘리지 않았다는 증거 같아서였다.


머리를 기른 시간만큼 나는 많은 걸 견뎌냈다.

말로 다 하지 못한 밤들, 이유 없이 눈물이 고이던 새벽, 괜찮은 척 웃다가 혼자 돌아오는 길. 머리를 묶을 때마다 손에 감기던 그 무게는, 내가 살아온 시간의 무게 같았다. 자르지 못했던 건 미련 때문이 아니라, 아직 끝내지 못한 마음들이 그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긴 머리는 나를 가려주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단정히 넘겨 묶고, 혼자 있을 때는 풀어헤쳤다. 머리가 얼굴을 가릴 때면, 세상으로부터 잠시 숨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도 괜찮았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조용히 버티는 법을 머리카락으로 배웠다.


거울 앞에 서면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머리는 계속 자라는데, 마음은 자주 멈췄다. 그래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직 괜찮다고, 아직은 더 살아볼 수 있다고. 긴 머리는 나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장치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느꼈다.

이 머리를 자르면 내가 사라질 것 같던 두려움이, 더 이상은 없다는 걸.

그동안 충분히 견뎠고, 충분히 울었고, 충분히 살아냈다는 걸.


가위가 머리를 스칠 때, 이상하게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웠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건 실패도 아니고, 상처도 아니고, 그냥 내가 지나온 시간이라고.


지금도 가끔 긴 머리를 했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아무 말 없이도 많은 걸 품고 있었던 아이.

세상이 차가워도, 자기 자신만큼은 놓지 않으려 애쓰던 사람.


그리고 나는 안다.

그때의 긴 머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자르지 않았던 게 아니라, 끝까지 나를 데리고 와준 것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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