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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Feb 25. 2017

비극은 나에게 닥칠 수도 있다...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리틀턴의 모든 엄마들이 아이가 안전하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우리 아이가 남을 더 해치기 전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했어요 (p. 17)


1999년 4월 20일 딜런이라는 19살 고등학생이 그의 친구 에릭과 함께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딜런의 엄마 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모범적인 가정에서 충실하게 아이를 키웠다고 자부했다. 내일모레 대학 입학을 앞둔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친구와 함께 15명을 죽이고 24명에게 신체적, 심리적 상흔을 남겼다. 


부모가 어떻게 모를 수 있어요?


내 아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줄 몰랐다는 수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위와 같이 질문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수 스스로도 다름 사람의 아이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수는 몰랐다. 아들의 내면을 더 깊이 봤어야 했다는 것을. 


보통 누군가를 잃는 일은 한순간 벼락처럼 닥치지만, 수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반복적으로 상실을 경험했다. 아들의 죽음, 내가 생각하던 아들의 모습에 대한 상실, 아들의 어두운 면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너져버린 자기방어, 살인자의 어머니라는 낙인을 제외한 모든 정체성의 상실, 삶이 이치에 따라 돌아가고 옳은 일을 하면 무시무시한 결과를 미칠 수 있다는 근본적 신념의 상실. (p. 18-19)


세상에 수많은 상실과 그로 인한 슬픔이 존재하지만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누구도 극복해내지 못할 끔찍한 사실과 그 사실의 원인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죄책감으로 남은 생을 살아간다는 것 이상의 지옥이 있을까.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수 자신이 겪은 비극으로 인한 슬픔에 대한 묘사가 많다. 극단적인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으리만큼 리얼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처절하고도 처참한 슬픔의 느낌을 왜 '가슴이 찢어진다'고 표현하는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심장이 가슴속에서 터지고 갈래갈래 찢기는 듯한 육체적 고통이 실제로 느껴졌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묘사였다. (p. 71)

그러나 이 책은 그녀가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고, 아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줄 몰랐다고 변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영화감독 박찬욱이 "악마가 되어버린 아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이 피눈물 나는 헛수고"라고 표현할 만큼, 이 책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녀의 "처절한 노력"의 일부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근원적인 인식의 개선을 통해 컬럼바인 총격과 같은 사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 부모는 아이들을 통제하거나 만들 수 없고 아이는 그저 알아가야 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맹목적 사랑 때문에 부모는 걱정스러운 행동을 보지 못하거나 나름대로 납득하고 넘어가려고 하기 쉽다. 문제의 아이가 '착한 아이'이고 부모와 사이가 좋다면 더욱 그렇다. 이런 행동들을 뚜렷이 직시하고, 무언가를 감지했을 때 행동으로 옮기기는 무척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난 후회가 닥칠 것이다.  (p. 330)

대개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한다. 특히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원하는 모습으로 양성하기 위한 노력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이는 자녀라는 존재가 아직 미완성된 존재로서, 그들의 신체와 정신을 부모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상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아주 어린아이도 부모를 포함한 성인을 감쪽같이 속일 만큼 거짓말을 잘할 수 있다는 수많은 연구보고서가 있다. 이를 보지 않아도,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만 보아도 명확하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 부모 또한 아이들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수는 부모의 관점에서 아이를 해석하고 이끌기보다 제3의 인격체로서의 아이를 알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춘기에 짜증 나는 것은 당연하지!'. '남자아이들이 다 그렇지 뭐!' '학교에서 일이 안 풀려서 기분이 나쁜가 보다' 식의 추측에 머무르지 말라고 조언한다. 사람마다 타고난 신체와 정신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아이"의 말과 행동, 기분과 감정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가라고 한다. 그래야만 진짜 아이의 행복을 북돋고, 아이의 위험을 막아줄 수 있다고.     


둘째, 범죄 자체와 범죄자의 가족에 대한 성숙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이 정말로 지상의 우리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타인의 행동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이 끔찍한 시간 동안 주변 사람들의 돌봄 덕에 우리는 버틸 수 있었다. (p. 156)

수와 그녀의 남편 톰, 큰 아들 바이런은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지탄을 받았고, 그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가족도 어찌할 수 없는 아이만의 문제였음을 인식한 친구와 피해자들의 가족들, 동일한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의 위로가 수의 가족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다. 수의 가족이 이 사건으로 만난 변호사, 정신 전문가, 경찰의 객관적인 문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사건이 죽은 범죄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가족과 이를 뉴스로 접하는 대중들에게 고통스럽지 않고, 모방범죄의 씨앗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 덕에 완벽하지는 않아도 범죄가 단순한 뉴스나 흥밋거리로 취급되지 않고, 원인 분석을 통한 미래 범죄 예방의 발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셋째, 뇌 건강 상태도 신체건강처럼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고, 자살은 뇌 건강 이상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병의 증상이고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징후다. 대부분의 자살은 한순간에 충동적인 결정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살은 대부분 고장 난 사고와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싸워오다가 마침내 그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일어난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기 고통을 더 이상 감내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죽고 싶지는 않더라도, 죽으면 이 고통이 끝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다. (p. 257)

수는 정신건강을 "뇌 건강"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신이라는 단어는 질병이 아닌 의지의 문제라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신체 어느 부분에 이상이 생길 때 혼자의 힘으로 극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유독 정신이나 심리적인 문제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으로 취급당한다. 그러다 보니 자살도 의지가 박약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선택"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수는 정신 및 심리에 대한 다양한 보고서, 전문가와의 상담과 인터뷰를 통해 물리적인 뇌의 이상이 정신적, 심리적 문제로 연결됨을 알았다. 특히 그 "문제"가 죽음을 통해 끝난다는 착각이 타살 또는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이 가장 심각하다. 그러므로 자살은 한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닌, 뇌 건강과 관련된 의학적,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넷째, "왜"보다는 "어떻게"에 초점을 두자는 것이다.

끔찍한 폭력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나도 범인의 가족은 어떤 이들일까 생각했었다. 부모가 가엾은 아이에게 어떻게 했길래 저런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생각했다. 따뜻한 환경에서 사랑으로 키운 아이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족에게 책임이 있다는 설명을 언제나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부모가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고, 어쩌면 학대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엄마가 아주 신경질적인 사람이거나, 숨 막히게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무기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p. 169)

사람들은 보통 어떤 일이 일어나면 "왜 저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왜"에 대한 해답을 찾고 상황을 단순화한다. '저 사람이 성격이 저런 이유는 가족문제 때문일 거야', ' 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직장 문제 때문일 거야'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한 판단은 미풍양속이나 미신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발이 크면 미인이 아니라서 전족을 해야 한다는 중국의 풍슴이나, 시험 전날 손톰을 깎으면 시험을 망친다는 학창 시절 우스운 인과관계를 떠올려보라. 이는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것을 선호하는 뇌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오죽하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국어시간에 가르치기까지 하겠는가?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게 단순한 이유 때문에 벌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안다. 따라서 수는 "왜"를 통한 찾은 해법으로 안심하는 습성을 벗어나, "어떻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자고 권유한다. 딜런의 자살이 딜런 가족의 양육문제 때문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딘가에 절대로 아이가 자살하지 않는 양육법이라도 있는가?


마지막으로, 비극을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다.

내 죽음이나 내 아이들이나 가족의 죽음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비극은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p. 189)

우리는 습관적으로 끔찍한 사건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그 이유는, 그런 걸 알아가면 기분이 좋지 않고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이 깔려있다. 그러나 나만 특별히 비켜가는 불운이란 없다. 신은 꽤 공평한 편이어서,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상황이나 태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나에게 어떤 행운이 또는 어떤 불행이 닥쳐올지 모른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비극의 종류는 다양해지고, 그 강도는 더 세질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닥친 비극을 살펴보고,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숭고한 성숙함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책을 읽는 내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수의 슬픔과 아픔에 내 마음도 저릿저릿했다. 내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남은 여생을 살아낼 수나 있었을까, 끊임없이 고민해 보았다. 살인-자살을 한 아들을 둔 엄마로서, 아들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지난 삶을 참회하고, 다른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과정을 거쳐 뇌 건강과 자살예방에 여생을 쏟기로 한 수의 생애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생명에 대한 경애와 애착이 강렬한 여인임에 틀림없다. 이런 엄마의 아들이 엄마로 인해 자살에 이르렀다는 비난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힘겹지만 생명력 있는 이야기 앞에서, 내 삶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음에 안도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기에 매 순간을 꾹꾹 밢아가며 충실히 살아가야겠다는 여운이 남을 뿐이다.   


딜런과 에릭의 죽기 전에 저지른 극악한 범죄를 인지하는 게 나한테는 중요했다. 이 책의 중심은 딜런에 대한 나의 사랑이기 때문에 딜런의 마지막 순간의 사악함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스스로 위안을 받기 위해 딜런이 한 행동을 축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딜런이 그날 죽거나 다친 무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면 내 심정이 어땠을까를 절대로 잊지 않을 생각이다. 소중한 아이들과 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책이니까. (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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