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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Mar 30. 2017

르네상스라는 문명의 몸부림

장 카르팡티에, 프랑수아 르브룅의 <지중해의 역사> 1~2부를 읽고...

대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바다인 지중해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이 만나는 곳이다. 대륙과 산맥들에 둘러싸여 폐쇄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서쪽으로 대양과 연결되어 있는 틀림없는 바다이다. 이 바다의 주변에는 항해하기에 유리하고 불리한 지역들이 공존했다. 이 때문에 더 유리한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숱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중해는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르네상스라는 진보된 문명을 얻었다. 이것은 도시 단위의 자치 정치, 원활한 지역 간 교류, 단일화된 정치와 문화 때문에 가능했다.


도시 단위의 자치 정치

고대 지중해 역사의 기반은 도시였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해상교역으로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농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서 도시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 갈등과 농지 부족으로 인해 지중해 연안의 외부 영토까지 식민지화하였는데, 이렇게 건설된 식민지들도 도시화되었다. 이렇게 그리스 내외부에서 발달한 도시에서는 법과 조직이 정비되었고, 화폐 기반의 경제가 발달했으며, 시민이라는 계급이 형성되었다. 시민 계급의 성장은 소작제와 참주 정치를 몰락시켰고, 아테네의 민주주의, 에트루리아와 라티움의 행정관 제도, 로마의 집정관 및 공화국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원활한 지역 간 교류

선사, 석기, 금속 시대를 거쳐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동지중해 시절부터 외부 인구의 유입이나 침략으로 인한 혼란은 지중해의 일상이었다. 불안정한 정치체제와 지역발전의 불균형은 국가 발전을 지연시켰다. 철기 시대에 들어서야 흩어져 살던 주민들이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크레타의 미노인, 그리스의 미케네인, 동지중해의 페니키아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은 바다를 통한 물자 및 문화 교류를 시작했다. 이러한 교류의 결과로 안정적인 정치와 종교, 성전 등의 도시 건축, 문자 기반의 역사 등이 발달했다.

아테네도 주변국과의 평화 동맹 및 동방원정을 통해서 에게해의 주도권을 잡고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지적 성장이 두드러졌는데, 아테네는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건축을 포함하여 문학, 철학, 의술, 과학, 수학 등 다방면에서 위인과 걸작을 배출했다

로마에서는 정복전쟁 이후 일자리가 없어진 시민들을 위한 영토 확보가 재개되면서, 해상무역과 도로망이 발달했다. 이러한 교역의 발달로, 로마는 부족한 곡물, 광물, 수공예품을 외부로부터 수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느 시대에서나 교역과 교류는 지역 발전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단일화된 정치와 문화

도시가 건설되고, 시민들이 교류하면서 문명이 발달해도, 더 많은 소유욕과 이로 인한 내부 분열은 문명의 파괴를 반복시켰다.

크레타 문명은 미케네인의 유입으로, 미케네인은 또 다른 새로운 인구의 유입으로 파괴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맞물리면서 아테네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민주주의를 몰락시켰다. 아테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전쟁을 기반으로 한 노력은 주민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러한 문명의 파괴는 단일화된 정치체제 하에서 회복되곤 하였다.

그리스 북부 지역의 승리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왕실 숭배 정치를 통해 단일화를 꾀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왕국들 간의 소소한 갈등은 있었으나, 그리스어 공용화나 도시 단위 기반의 정치체제 덕에 단일성이 유지되었다. 교육기관, 극장, 광장, 성소 등의 건축, 등대와 수로 등의 해상교역 및 항해 수단, 측량기, 펌프 등의 기술, 그리고 지리, 지도, 항해 관련 과학 등이 다채롭게 발달하였다. 동부 로마는 지중해 도시들과의 동맹 및 식민지화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고, 확장된 영토 안에서 평민 계급, 신귀족제 기반의 공화국 제도를 단일하게 적용하였다. 아우구스투스도 신성 강화와 황제 숭배를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시키고,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통합하면서 단일 문화를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도시 단위의 자치 정치, 원활한 지역 간 교류, 단일화된 정치와 문화라는 조건 하에서는 지중해의 불리한 자연조건, 지역 간 차이나 불균형이 전쟁이나 문명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았다.  지중해의 변덕스러운 기후는 항해술을 발달시켰고, 지역마다 차이 나는 자연조건은 곡물, 올리브, 포도, 목축 등 특산물 생산에 최적이었다. 항해술과 특산물 수확의 발전은 지중해 주변 국가들 간의 잦은 교류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국가 간 관계를 호전시켰다. 여기에 교통과 통신 및 복식부기의 발달로 이동이 필요 없는 무역 기반의 경제가 발전했다. 여유 있는 삶은 지적/예술적 삶을 발전시켜 헬레니즘에 이어 르네상스 문명까지 탄생시켰다.


그러나 화려한 문명의 탄생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 지중해는 대립의 경계이다가 융합의 터전으로 변화하는 다이내믹한 바다였다. 종교 갈등이나 정치적 대립이 생겼다가도 교역을 통해 복합화되고, 융합되기도 하는 터전이었다.


고대 지중해 시대에 크레타 문명은 미케네인의 유입으로, 미케네인의문명은 또 다른 새로운 인구의 유입으로 파괴되었다. 다양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로마는 더 넓은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으로 경제, 사회, 정치적 불평등과 시민들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식민지의 토착문화를 인정하면서도 단일화된 로마식 정책들을 강요하는 바람에 지역 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정치 강화를 목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하였으나, 예수와 하느님의 일치를 믿는 자들과 불일치를 믿는 자들의 대립으로 교리의 법제화를 시행해야만 했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은 이전 문명의 근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근원, 기독교의 근원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문명과 더 많은 소유를 위한 탐욕에서 기인하였다. 문명의 근원에 대한 탐구 없이 무조건적인 통합과 융합은 강요에 그칠 뿐, 진정한 문명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빠른 정치적, 경제적 성장만을 추구해온 우리나라가 자연환경, 문화와 윤리적 사고의 상실을 뒤늦게 깨닫고 있는 상황도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


르네상스의 개화는 단순한 문명의 발전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당시의 부유함을 지중해에 갚아야 할 빚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근원을 찾고자 지적, 예술적 삶을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 르네상스는 그리스어 중심의 문화적 원천을 찾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자, 단일성 유지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 개혁을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부유함이 생의 목표가 되고 있는 오늘날이다. 르네상스 정신에 대한 깊은 되새김을 통해 우리만의 몸부림 방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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