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은 얼마 전 한국에서 일어난 여고생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포털 사이트에서 이 사건을 검색해 보면, 이로 인해 죄 없는(?) 조현병 환자들이 앞으로 얼마나 많이 경계되고 왕따(?)를 당할지 불을 보듯 뻔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리석은(?) 대중들은 뉴스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겁을 먹고, 가장 손쉬운 대상을 비판하고 경계하고, 자신을 방어할 무언가를 구입한 후에야 안심한다. 그들은 공포를 조장해서 권력을 쥐고, 소비를 유도하는 저 위에(?) 계시는 분들의 모습이 절대로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저자이자,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인 수 클리보드는 숱한 비난과 위로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말은 다름 아닌 "어떻게 부모가 모를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대중들에게는 머리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건들을 단순화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콜럼바인 사건은 범인의 부모가 자녀를 살뜰히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거나, 청소년들이 "매트릭스"와 같은 폭력성 영화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라거나, 총기를 어디서든 살 수 있는 미국 문화 때문에 일어났다는 식이다. (마이클 무어는 영화 속에서 딜런과 또 다른 범인인 에릭이 사건 당일 아침 볼링을 쳤으니, 볼링이 범죄의 원인이 아니냐고 풍자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내 머리와 마음이 해답을 찾았다는 착각(?)으로 평온을 찾는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자신들에게 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자신들의 아이들이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와 교제하지 않게 하면 된다"는 식의 자신들만의 안심용 결론을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잠깐의(?) 안도로 인해 외면되는 수많은 원인들을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 한, 누구의 아이도 절대로 안전할 수 없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와 수 클리보드는 각자의 방식으로 콜럼바인 사건의 기저에 깔린 문제들을 찾아 해결하려 노력했다.
마이클 무어는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사회에 만연한 정치/사회/경제적 공포 조장을 멈출 수 있기를 바랐던 듯하다. 공포 조장을 위한 미국의 전쟁 기반 정치 역사, 사회경제적 양극화, 인종과 문화예술의 차별, 화제 중심의 미디어 현장을 확인한다. 그리고 캐나다의 협상 중심 정치,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제도, 다양한 인종과 문화 간 존중이 국민들의 마음에서 공포심을 몰아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1천만 명 중 7백만 명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음에도 총기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나라, 이웃에 대한 의심이 없어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사는 나라가 캐나다였다.
수 클리보드는 범죄와 뇌 건강에 대한 인식의 개선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수는 이 사건으로 만난 변호사, 정신 전문가, 경찰의 객관적인 문제 인식과 행동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사건이 죽은 범죄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가족과 이를 뉴스로 접하는 대중들에게 고통스럽지 않고, 모방범죄의 씨앗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 덕에 완벽하지는 않아도 범죄가 단순한 뉴스나 흥밋거리로 취급되지 않고, 원인 분석을 통한 미래 범죄 예방의 발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수는 또한 정신건강을 "뇌 건강"이라는 단어로 치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신이라는 단어는 질병이 아닌 의지의 문제라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신체 어느 부분에 이상이 생길 때 혼자 힘으로 극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유독 정신적 문제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으로 취급당한다. 그러다 보니 자살도 의지가 박약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선택"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수는 다양한 보고서, 전문가와의 상담과 인터뷰를 통해 물리적인 뇌의 이상이 정신적, 심리적 문제를 일으킴을 알았다. 특히 그 "문제"가 죽음을 통해 끝난다는 착각이 타살 또는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이 가장 심각했다. 그러므로 자살은 한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닌, 뇌 건강과 관련된 의학적,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내용 외에도 마이클과 수가 발견한 문제와 해결방안은 더 있었다. 대기업과 총기협회의 자본 중심 경영, 통제 중심의 단편적 교육, 가해자들의 말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현실 등.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콜럼바인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단정 짓는 일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그 이면에 깔린 근본적이고 복합적인 현상들을 파악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특정 개인의 문제 혹은 단편적인 원인 제거가 아닌 국가나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시스템과 사회적 인식으로, 두렵고 무서운 것이 없으며 이웃을 믿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원인 추적보다 문제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만 가지의 사람들과 민족들이 모여 살아도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백만 가정이 총기를 버유하고 있어도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이런 공포조장은 정치, 경제적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툭하면 거론되는 북한의 도발 위험성, 음식이나 건강을 위협하는 수많은 뉴스들을 떠올려보라. 확인되지 않은 미디어의 발표(?)에 휘둘리는 대중들의 투표와 소비는 엉뚱한 정치인을 사장시키시도, 거대한 기업 하나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또한 너무 많은 공포요인들이 자주 언급되다보니, 정작 정말 심각하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그것이 양치기 소년의 외침인양 믿지 않거나 무감각해지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언제까지 우매한 대중으로서 이렇게 휘둘리고 살아야만 하는가?
이제 대중들도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단편적이고 대중적인 미디어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고, 심도 깊은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책과 다큐멘터리, 영화와 같이 비록 길고 지루할지라도 더 자유롭고 나은 삶을 위해 공부를 멈춰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의 자본가와 권력자들이 조장하는 공포에 떨면서, 그들의 말에 얽매이는 노예 같은 삶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